신비(妙)어록4-신화와 막장 사이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 불치병.
통속극의 3대 요소다.
요즘 막장 드라마의 중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설정이 다 갖추어진다 해도
막장의 자격이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막장의 자격요건은
권모술수와 음해, 수준미달의 각종 해코지가 되겠다.
주인공은 착한 걸 넘어 멍청해야 하고
늘 최악의 수법에 당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연이자 악역은
일명 잔머리와 권모술수에 능해야 한다.
또한 인간 수준이 아주 바닥을 쳐야 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주인공을 고문해야 한다.
또한 주인공은 혼자 힘으로는 똑바로 서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민폐캐릭터여야 한다.
그리하여 조연은 그 눈부신(?) 악행으로 주인공을 압도해버리고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극을 이끌어 가야 한다.
막장의 요소란 이렇듯 까다롭기만 하다.
예전 통속소설의 3대 요소는
이제 막장 드라마의 단순배경에 불과하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만 한다면,
기적을 불러일으키기만 한다면,
통속소설의 요소를 한둘쯤 갖추고 있다 해도
동화처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통쾌한 깨달음의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영화나 동화엔
통속적인 설정 자체가 필요 없다.
깨달음 자체가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바로 설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드라마는 저 까다로운 막장의 조건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두루 갖추고 있다.
슬프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인류의 일은 제쳐두고,
끝내 자기 삶의 주인공은 되지 못하고,
그저 찌질한 사랑타령이나 일삼고 있다.
신(神)을 만나면 바로 해결될 일을
주야장천 출생의 비밀만 캐고 앉아 있다.
차라리 영감을 주는 악의 화신이라도 되어야 할 것을
찌질함의 극치만을 달리고 있다.
말하건대 영감을 주지 못하는 악역은 악역이 아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기 침대 사이즈에 맞춰
사람들의 몸을 늘리거나 자르는 게 일이다.
그의 악행이 불우한 가정환경 탓이라는 둥의 잡다한 뒷얘기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시사다큐나 토크쇼의 몫이다.
그리스 신화가 막장이 아닌 이유는,
영웅들의 이야기, 즉 신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수한 상징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판타스틱한 세계가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원전(原典), 혹은 최초의 씨앗,
바로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원형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극화, 드라마와 소설과 영화가
신화에서 발단되지 않은 것이 있던가?
그 판타지가 세상 모든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다.
신화는 현실이다.
신화에서 현실을 발견할 수 있고,
신화를 통해 현실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100% 순수현실만을 그리는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위험하다.
그것은 신화에서 막장 드라마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에게서 폐륜을,
테세우스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헬레네와 파리스에게서 삼각관계를 캐치해내는 것과 같다.
인류구원이라는 애초 문학의 존재가치를 망각한 작가는
신화를 읽고 막장드라마를 구상하게 된다.
상징은 스킵하고 현상만을 섭취하게 된다.
캐릭터가 아니라 사건으로 승부하게 된다.
묘사 불가능에 서술 집착형이 된다.
내러티브 아닌 스트레이트가 돼버린다.
무엇인가?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면 저절로 사건이 만들어지고
그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사건이 억지로 꿰어 맞추어지면 캐릭터가 죽고
억지설정, 일관성 실종, 우연 남발, 뻔한 졸속 해피엔딩이 된다.
상징적인 장면이나 완전한 이미지가 아니라
독백이나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처리하는 해프닝이 빚어진다.
통속적 사랑타령이나 권모술수가 문제가 아니라,
서술 일관의 사실 나열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나 선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가의 난잡한 정신세계가 문제다.
독자의 하향평준화가 문제다.
그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 가는 세상,
그 협소하기 짝이 없는 바운더리가 문제다.
시 한 줄에 독자는 그 이후의 삶이 바뀌고
영화 한 편으로 인류의 뇌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소설이나 드라마 한 편이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인류를 구원할만한 위대한 만남을 주선하기는 한다.
작가란 그 위대한 만남의 메신저다.
세상 모든 작가가 사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매순간 신(神)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사실만큼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억지 설정과 추악한 행태로 긴장을 만들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갈등조작으로 독자를 낚을 것이 아니라,
활처럼 팽팽한 삶의 태도로써 긴장을 이루어내고,
아슬아슬 삶에 안주하지 않는 방법으로
독자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작가란 누구보다 삶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깨달음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직무유기를 일삼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허무하다.
그들의 화려한 필력이 슬프다.
인간에 다가가지 못하고 버려지는 수많은 드라마들이 안쓰럽다.
역동성을 활활 불태우지 못하는 독자와의 관계가 답답하다.
직장의 신(2013), 미스 김이 비주류 작가였다면
아마 그들에게 한마디해줬을 것이다.
“독자를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제 자신을 잃는 일입니다!”
시인 신동엽님도 말했었다.
“껍데기는 가라!”
사막여우도 빠지지 않는다.
“함부로 친한 척 하지 마라!”
어린 왕자도 물론이다.
“어린애보다 못한 가련한 어른들……”
소로우는 언제나 그런 스타일!
“그들은 끝끝내 내 글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