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妙)어록4-인생은 오지여행3
담비가 숲의 제왕인지 그 당시엔 잘 몰랐다.
내가 본 담비는 빛나는 털을 가진 영물인데다
깊은 계곡 그 수려하고 거대한 바위를
묘기를 부리듯 순식간에 날아오르는
흡사 날다람쥐처럼 귀엽기만 한 추억이었으니.
그때까지도 나와 친구들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한반도에 호랑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또한 강원도 어디에서 호랑이 발자국을 본 것,
거기다 강물을 건너 도착한 인적 없는 오지엔
철새와 꽤 큰 네 발 짐승의 발자국이 있었으니.
호랑이와 표범이 존재한다면 숲의 제왕은
담비가 아니라 단연코 호랑이가 되는 것이다.
인왕산이 아니라면 강원도 어딘가 쯤에
호랑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디아나 존스가 성배를 찾는 것보다 신나는 모험.
그렇다. 누군가는 호랑이를 보았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TV에서 호랑이를 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진도, 발자국도, 꽤나 그럴듯한 증거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숲의 제왕은 호랑이다.
인간들이 보지 못해도 호랑이가 있다면
그것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에 버금가는 일.
TV 다큐가 아니면 담비도 보지 못하는 21세기에
호랑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신(神)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생경하고도 신비하고도 성스러운 이야기.
그러나 나는 자주 가던 계곡에서 분명히
빛나는 털을 가진 담비를 보았고
큰 짐승의 발자국을 보았고
그리고 - 다큐 프로그램에서 - 호랑이를 보았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신을 매순간 보고 있다.
이는 단지 동화 속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매순간 업그레이드되는 최신판 뉴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누군가는 보는 것을 오직 그대만 못 볼 수 있다.
인간들이 못 보는 것을 나 홀로 매 순간 보는 것처럼!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 뿐!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과 교감하지 않을 뿐!
신은 오로지 나와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론은 당신 혼자 눈감고 있다는 것,
가련하게도 당신 혼자 소외되어 있다는 것.
세상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한통속으로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
당신 혼자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뜨면 고라니가 죽은 물에 라면을 끓여 먹고도
일체유심조라 새삼스레 떠들 일이 없다.
해골 물을 마신 원효처럼 고라니 시체 물을 마신 나는
짜릿한 모험에 신이 나 두둥실 날아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순간 시체를 찾아 모험을 떠난
리버피닉스와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토토로와 모험을 떠나는 사츠키와 메이가 되어 있었다.
길에서 태어나고 기어이 길에서 산화할 길의 주인,
바로 나의 히로인이 되어 있었다.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되어 그를 지배하는 자는
그예 꿈과 길을 지배할 수 있다.
온전히 지배하는 자만이
생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인적이 없어 깨끗하기 그지없던 계곡.
그곳에서 작은 모닥불에 훌훌 끓여먹은 내 생애 최고의 라면.
그리고 계곡의 원류를 따라 올라가 보았던 고라니 시체.
내게 생이란 그 작은 폭포에서 본,
미처 감지 못했던 고라니 새끼의 눈과도 같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