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동하면 재미있다!
혼동하면 재미있다!
가끔 시나리오를 쓸 때가 있다.
주인공은 물론 여자다.
나의 페르소나이며, 동시에 신(神)이어야 하니까.
그 여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놀라거나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주인공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그는 여전히 영화 속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관객에게 줘야 할 힌트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자막이 올라갈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타나
여태까지의 이야기가 담긴 USB메모리를 귀걸이처럼 귀에 걸고는
보일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 주인공의 특징은 표정이 별로 없다는 것!
나는 영화 속, 혹은 드라마 속 연기자들의
변화무쌍한 표정연기에 별로 공감하지 못한다.
놀라고 당황하고 절망하는 그 오버된 표정!
나는 그렇게 극적인 순간에 그렇게나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이나 눈동자의 동요,
살짝 템포가 달라지는 눈 깜박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사실은 그런 것까지도 필요 없다.
그런 극적인 순간, 나에게선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고 하니까.
그래서 다들 반응을 강요하는 듯한 말과 표정을 되풀이하니까.
하긴 내 주인공은 눈 깜박임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뇌의 표정과 심장의 박동뿐이다.
잠시 스치는 생각에 터질 듯 쿵쾅거리는 가슴!
그런 급격한 변화는 오히려 극적인 순간보다
이를테면 반가운 친구를 만나기 전에 일어난다.
만나기 하루 전, 혹은 열 시간 전, 어쩌면 한 시간 전에!
그럴 때 내 주인공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히로인은 심장병 환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표정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나는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영화를 좋아한다.
환상과 실제가 함께 뛰어놀아 어느 것이 실제인지
어느 것이 환상인지 전혀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너와 나의 구분이 불가능한 영화.
때론 현실도 우연과 시나리오의 구분이 힘들어진다.
너와 내가 섞여,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될 때
너는 나를 표현하고 나는 너를 연기할 때
일상은 드라마가 되고 환타지가 일상이 될 때
그때 나는 너를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닐까!
그때 너는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정이 깊은 사람이 오히려 철저하게 냉정해지는 법이다.
마음 여린 사람이 때로 더욱 독한 기운을 내뿜는 것이다.
실제와 환상을 혼동하면 재미있다!
꿈과 현실도, 실제와 환상도, 픽션과 넌픽션도 마음껏 혼동하라.
그 혼돈을 창조한 사람은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모든 것은 누군가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
함부로 걱정하고 함부로 웃고 화낼 수 있겠는가?
그러는 순간, 누군가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될 수 있다.
자신 없다면 아마, 이불 뒤집어쓰고 혼자 울고 웃는 게 좋을 것이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