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명상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다.
스케일 크게 생각하자면 ‘내가 만약 신이라면?’
이 하나의 전제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나 여태껏 그 말 알아듣는 이 하나를 보지 못했다.
하긴 알아들었다 해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알아듣고 행하려 하면 어떻게 해도 그 말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행이 먼저고 스스로의 그 행을 알아차리는 것이 나중의 일이다.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또 이미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겠지만
장담하건대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진짜로 아는 이는 없다.
진정으로 아는 이는 결코 안다고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물론 이해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그건 비밀이다.
또한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또한 스타일이 있는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
사람들은 언제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신’이라고 말하면 대번에 그 권력을 떠올리는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내가 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이 내가 되는 문제는 세상과는 하등 무관한 일이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세상 탓을 하며 혀를 차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세계가 빈약한 이의 변명이 될 뿐이다.
잘난 체 해가며 세상 탓을 한다고 하여,
자신의 세계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글을 많이 읽는다고 하여 그리된다는 보장도 없다.
타인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어쩌면 환상의 세계에서 허깨비를 쫒는 것!
남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또한 ‘우주’라고 하면 그저 헛바람이 들어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허황한 소리를 해대기가 일쑤.
아멜리 노통이 메타포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신이나 우주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있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얻으셨나요?"하고 새삼스레 묻는 이도 있다.
그 황당한 질문에 답하기란 유치한 일이거니와
신비(妙)어록은 단지 내 상상의 산물이거나 어떤 이상향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나 자신을 관찰한 <절대 인간보고서>이다.
타인의 생을 보듯 나 자신의 생을 지켜보고
마치 일기처럼 순간순간을 기록한 내 삶의 연구서!
-혹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신에게 띄우는 연서이다.
그것은 일종의 텔레파시와 같다.
나는 해외여행에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에도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나는 영어나 국어가 아닌 텔레파시로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나의 정신은 저 위의 어떤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내려다보며 그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것!
내 마음 나도 몰라, 라는 노랫말도 있지만
나는 내 눈빛과 표정, 자세와 분위기를 기억하며
또한 그런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생각까지도 기억한다.
나와 나를 바라보던 이를 또한 멀리 위에서 지켜보던 내가 또 있었으니까!
그런 장면장면들은 마치 영화처럼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소장된다.
되감기를 하지 않고도 언제라도 재생할 수 있으며
그 분위기와 느낌과 생각까지도 고스란히 다시 지켜볼 수 있다.
전지적 시점인 나의 영화는 그래서 왜곡되는 법이 없다.
'깨달음'이란 단지 어떤 사실을 깨닫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할까?
내가 명상에 관한 글을 쓰게 된 동기라면 동기일 것이다.
타인과는 다른 나,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행동과 생각들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인간들은 학교에 온 학생의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질 때라면 오로지
무언가를 배워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때,
혹은 스승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할 때이다.
아니라면 맞겨루어서 주도권을 쥐어보겠다고 설칠 때이고.
스승과 제자는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사람들은 부득부득 제자의 표정을 하고 제자의 언어로
제자의 자리에 서서 제자의 역할을 한다.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더욱 확고하게 제자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하여간 깨달음의 세계에 ‘나중’은 없는 법!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결판난다. 승부는 ‘순간'인 것이다!
겨루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재가 안되면 미래에라도 이겨보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찰나, 깨달음의 날카로운 칼끝은 급소를 파고든다.
그 순간 이미 죽은 것, 나중에 보자니 그런 말들이 죄다 한가한 잡담인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시간이란 도무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상대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것은 지금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처절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이제야 새삼스레 뭔가 배워서 해보겠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죽은 학문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배워 선생도 교수도 될 수 있겠지만
생명 그 자체인 깨달음의 세계에는 ‘찰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초 전의 과거나 일초 후의 미래조차 허용하지 않는 깨달음의 세계!
그 고독한 세계에 대해 희망을 주는 일 따위 나는 하지 않는다.
“너도 깨달을 수 있어!" 친절한 체하는 말은 그저 사기일 뿐.
그런 까닭으로 그 많은 명상센터며 사이트들이 날로 번성하는 것이다.
대신 너와 나가 없으므로 그 세계를 함께 향유할 수는 있다.
세상에 깨달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