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화에서 만남이나 사랑을 연상시키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주인공들은 서로 말도 걸지 않으며 잘 만나지도 않는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도 그들이 충동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완벽한 인물이기도 하려니와
완전한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드문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오로지 꿈이나 환상으로만 그려진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도 환상으로 처리되긴 마찬가지다.
사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오히려 사랑 그 자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내겐 관객에게 모종의 기대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다.
완전한 사랑은 일상에서도 가능하리라는 아주 위험한 기대!
함부로 만나고 사랑해도 사랑은 다 아름다울 거란 헛된 기대!
그러나 여타 작가들과 달리 나는 주인공을 죽이지는 않는다.
내가 주인공들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완전한 사랑은
추억, 혹은 기억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걸핏하면 주인공을 죽이는 방법을 쓰곤 하지만
그 방법은 오히려 현실에서 더 먹히는 방법임을 나는 알고 있다.
영화<사랑한다면 그들처럼>의 주인공처럼 절정의 순간에,
사랑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죽는 건 어찌보면 허무하도록 간단한 일!
그렇게 살아남은 자가, 죽은 이를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거기까지가 다다! '죽은 이' 그 이상으로 기억되는 데엔 역시 무리가 있다.
최진실의 신파 <편지>가 표절했을 법한 오래된 프랑스 영화에서도
그런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갈구는 인상 깊게 그려지고 있다.
사랑을 되살리려는 남편의 거의 발악이라고 해야 할 노력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 때까지 무모하게도 계속 되고 있다.
아내에게 익명의 러브레터와 꽃을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 러브레터의 주인공이 되어 낯선 호텔로 유인하기도 하며
때로는 술에 취해 스와핑에 가까운 짓을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주위 사람은 물론 아내에게도 냉대를 받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남편의 노력은 아주 진지하게 오랫동안 준비된다.
<편지>의 마지막처럼 울고 짜는 찌질한 장면은 아니지만
웬만한 영화, 비디오 장면의 원조일 법한 비디오 신(S#)이 있다.
하지만 죽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살아서 완전하기 보다는!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사랑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죽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라고 두 번쯤 말해도 흉이 안 될 정도로.
소나기의 소녀도 죽었고 김수현의 여주인공도 죽었지만
죽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최후의 방법이다!
그리고 나는 최후의 방법을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조금쯤 멋져 보이도록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실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또 다른 방법에 다름 아니다.
주인공(사실 상대역)은 죽는 거밖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죽는 것.
그러므로 주인공(상대역)을 죽이는 일은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하는 거다.
작가가 쓸데없이 주인공(상대역)을 죽일 때에는 그런 고백쯤 각오해야 하는 것.
그렇다면 죽지 못한 우리의 주인공(상대역)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당연히 죽음에 버금가는 강한 임팩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죽음보다 감미롭고, 죽음보다 화끈하고, 죽음보다 강렬하고
때로는 죽음보다 더 처절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우리의 주인공(상대역)을 기억해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나의 히로인에게 되도록 완전하기를 요구하곤 하지만.
그는 이미 내 요구 이전에 스스로에게 잔인하리만치 철저하다.
눈빛 하나, 표정 하나, 말투 하나까지도 고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내가 아주 완전하다고 믿는 장면조차도 만족해하지 않는다.
가슴 속 열정은 식은 지 오래고 그저 테크닉만 남은 추한 배우의 모습.
그는 그렇게 설렘이 사라진 그저 능숙한 자가 될까 스스로 경계한다.
하지만 나는 염려하지 않는다. 내가 염려하는 것을 들켜서도 안 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신도 자신을 아주 잘 아는 이와 만날 땐 가슴 설렐 것이다!
그저 일상이 아닌, 어쩌다가 한 번 그토록 그리던 이를 만날 땐
신도 가슴 두근거릴 것이며, 때론 웃지 못 할 실수도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해도, 아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에
오히려 그 찬란하고도 장대한 순간을 자못 가슴 떨려 할 것이다.
나의 히로인이 그런 고뇌들로 밤잠을 설치는 것은 사실 고무적인 일이다.
그는 결코 어느 한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스타일이 못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일상이 아니다. 사랑은 꿈이다! 방금 깨어난 꿈속에서처럼
뭉게뭉게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 사랑은 피어나고 충만해야 한다.
어제 일을 되돌아 봐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가지 않아야 한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웃고 떠들던 그 사람도 그저 꿈속의 존재여야 한다.
언제라도 말 걸 수 있고 언제라도 대면할 수 있다 해도 사실
언제라도 말 걸 수 있고 언제라도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최후의 방법을 아직 쓰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상이 아니다. 사랑은 꿈이다! 주말이나 일요일 한 낮
소파에 널브러진 가부장처럼 지루하고 한심한 그림이 아니어야 한다.
첫 키스처럼 날카롭게, 섬광처럼 번쩍이며 스쳐지나가야 한다.
무인도에서 마침내 발견한 과일처럼, 까마득히 멀리 지나치는 유람선처럼
서로에겐 아주 잠깐 꿈속에서나 본 듯한 아쉽고도 아쉬운 존재여야 한다.
흡사 소년이 소녀와 헤어질 때의 그런 눈빛으로 서로는 존재해야 한다.
그런 완전한 느낌을 최후의 방법을 쓰지 않고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전략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고, 조바심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채로,
마음껏 자신을 펼치면서도 자유자재로 그 기분을 누리면서도
그 첫 키스 같고, 섬광 같고, 꿈속 같은 것을 오랫동안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마침내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그 모종의 모드를, 미치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기꺼이 유지할 수 있다면 시인은 절필할 이유가 없고
화가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제 머리를 쥐어뜯을 일이 없다.
음악가는 미친 듯이 불후의 명곡을 작곡할 것이며 후세의 추종자들은
그의 연인의 이름과 사연을 밝혀내느라 오두방정을 떨어댈 것이다.
어른도 아이처럼 맑고 투명할 것이며 남자도 여자처럼 예민할 것이다.
아이도 어른처럼 기다릴 줄 알 것이며 여자도 남자처럼 멋질 것이다.
그럴 때 자식을 낳지 않고도 세상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다!
그럴 때 부모를 의식하지 않고도 신과 가장 가까이 지낼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을 때야 있을까마는 설사 그때가 온다 해도
내 영화에선 최후의 방법에 대해 미리 결정해 두지 않을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는
그런 평범하고도 할 일 없는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내 영화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호들갑 떠는 인사나
상대에 대해 익히 잘 안다는 듯한 표정을 가진 인간은 물론.
아주 능수능란한 말솜씨와 의기양양한 표정을 가진 배우도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조차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세치 혀로는 온갖 사치스럽고 달콤한 말들을 주워섬기지만
그 표정과 걸음걸이는 이미 늙어 버렸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설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 같은 표정, 풀려버린 눈동자,
한심한 담배연기 따위는 50m앞 자동차 안의 거울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가끔은 뱃속까지 들여다보는 내 섬뜩한 눈빛에 스스로도 괴로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겁도 없이, 준비도 없이 오디션을 보러오는 초보를 보면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 해도 눈 마주치기조차 싫을 때가 많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은 이미 차를 몰고 저 멀리 사라져 버리는 것!
나는 오래 살 것이지만 단 한 순간도 허망하게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영화의 한 순간은 영원보다도 길고 영원은 섬광처럼이나 짧기 때문이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