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깨달음

나, 그리고 깨달음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2:59

어차피 나는 세상에 등 돌려 앉은 지 오래된 사람이다.

죽림칠현처럼 오만한 발상에서 근원했지만 시쳇말로 하자면 세상에 '삐친' 것이랄 수도.

나는 세상이나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사회적 자살자이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의미에서의 자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병명(?)은 말하자면 의도적 자폐증!

그러나 끊임없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므로

또한 그것은 엄연한 나의 사회적 시선이며 하나의 포즈이므로

나의 자폐증은 일종의 ‘스타일’이다.

삶은 내게 통째로 하나의 종교이자 예술이다.

나는 매 순간 신을 그리는 성직자, 삶을 연주하는 예술가!

지금 이 순간도 최고의 완성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99.9 퍼센트에 만족할 줄 모르는,

단 0.1퍼센트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제단 위로 걸어올라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 0.1퍼센트의 떨림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한 자루의 검을 만들기 위해, 하나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장인(匠人)은 어떻게 제 뼈와 살을 깎았는지 나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 가진 단 한 자루의 진검은 지금 이 순간도 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내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고

또한 나만의 법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자신의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꼭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사실 타인을 존중하는 척 해야 할 때의 나의 ‘가식’일 뿐!

사실 자신의 세계가 빈약한 이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자신의 법이 자신만의 철학으로 체계화된 사람은 거의 없다.

가난은 숨길 수 없는 것.

영혼의 가난이 물질적 가난보다 허술하여 훨씬 들키기 쉽다는 것을 아는가?

자신의 세계가 빈약한 이는 쉽게 드러난다.

그것은 육안으로도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의 부자는 알아보기 어렵다.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고귀할 뿐 아니라 그만큼 그것을 본 이도 적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고대에 몇 명이, 그리고 19세기에 두어 명,

현대에는 서너 명 정도가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물론 위대한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나는 나와 통할 그 몇 인간하고만 교류한다.

나의 세계는 평면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식’이란 말도 당연히 입체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나는 가식적인 인간이다!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미안한 척 하기도 하고, 싫지 않은데 싫은 척하기도 하며

화나지 않았으면서 화난 척 하기도 하는 것이다.

평면의 세계에 사는 사람도 당연히 나 같은 섬세한 심사를 가졌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스스로 평면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자신의 심사조차도 정확히 깨닫지 못한 것일 터!

나는 가식을 떨며 어떤 사태를 콘트롤할 때가 있는 것이다.

관건은 물론 진심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얘기이다.

평면적 이해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감정적인 척’ 해야 할 때가 당연히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나에게 교활하다거나 음흉하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착한 인간이 아니다.

“당신 참 멋지다!” 라고 말하기보다 “당신, 무서운 사람이군요.” 혹은

“당신 참 음흉하네요.” “당신, 정말 교활한 거 알아요? 미워...”

라고 말한다면 혹시 쾌감을 느낄지도 모를 텐데...

 

 

나는 어쩌면 상품이다. 아니,

나의 세계가 상품이다. 그것도 팔래야 팔수 없는!

아니다! 팔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세계를 엿보는 이는 돈을 내야 한다.

그 때가 언제일진 몰라도 내가 신에게 진 빚을 다 갚는 날,

나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

사실, 신이라면 모르되 인간이라면 ‘스스로’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신을 유혹할 만큼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신도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신이여! 부디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나라!

세상의 모든 이가 최소한 유신론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내 생각으로 말하자면,

최소한 누군가에게 말을 걸려면 먼저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다고 여길 만큼!

이야기는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을 바란다면, 대화를 원한다면, 소통을 갈구한다면

스스로 먼저 빛나는 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신에게 빚 진 사람.

혹시라도 나에게 말을 걸려면 적어도 신에게 먼저 빚을 지고 와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을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나서라야 하는 것!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개인적으로' 함부로 상대해 달라고 하면 못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물론이고 내 보석같은 친구들의 수준이 한꺼번에 확 떨어지는데?

어떻게 만들어 가는 작품인데, 작품 망칠 일 있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그것도 대문도 아니고 개구멍으로 들어와

기껏 어렵게 만들어 가는 작품에 감히 분탕질을 한다면?

더구나 대문까지 열어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공짜 너무 좋아하면 못 쓰는 법이다.

지금도 충분히 공짜로 퍼 주고 있는 거 안보이나?


 

소통?

모든 언어는 입체의 세계에 살고 있다.

언어란 결코 평면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깨달음이란 말 역시 평면의 캐릭터를 가지지 않았다.

깨달음에 대해 곧이 곧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

깨달음병에 걸려 소통에의 강박을 가지면 안 된다.

소통은 여명처럼, 태양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실현되는 것이지

소통하자고 말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깨달음'을 무슨 누구집 개 이름마냥 불러대며 무시하는 것도 용납 못한다.

달마실에서 하도 소통, 소통하니 아무하고나 말만 하면 막 소통이 되는 줄 안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 혹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깨달음에 관한 글들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스스로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항상 웃고 산다, 혹은 나는 깨달았다, 혹은 당신이 말하는 깨달음은 뭐냐. 등등

그래서 뭘 어쩌라고? 누가 물어 봤나? 뭘 믿고 공짜로 말해달래?

문제는 그런 사람은 항상 말로만 그런다는 것이다.

삶으로 보여달라는  말이다!

예수나 부처 혹은 달마실, 누구누구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관점'과 그로 인한 '자기 삶의 스타일'을 말이다.

다른 이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관점이 있다면 왜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는가?

단 몇 시간만 암 생각 없이 살려고 해도 되지 않을 만큼 이렇게 절절하고도 넘치는 건데?

사적으로 말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한다면, 그렇다면

비로소 말문이 터진 것에 대해 정말 축하를 해줄 텐데 말이다.

 

 

'깨달음'이나 '소통'을 언급하려면 먼저, '최소한의 예의'는 떼고 와야 하는 것이다.

그 예의는 물론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 무지한 것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예의는 필요 없다'고 하면, 진짜로 무례하게 구는 인간도 있다.

'너는 나, 나는 너'라고 하면, 아무 때나 막 함부로 들이대도 되는 줄 아는 인간도 있다.

사소한 말 걸기에도 미학이 필요한 법이다.

깨달음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세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대작에다 함부로 붓질을 하는 우를 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개구멍으로 들어와 소란 피우면 개구멍은 물론 대문까지 못 박아 버리는 법.

함부로 말 걸지 말아야 한다!

귀찮아 죽을 것 같으면, 정말로 확 죽어버리는 인간도 있으니.

그때는 이미 늦는 것이 아니겠는가!

깨달음이 뭐 그리 흔한 일인지 아나...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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