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명상가는 왜 글을 쓰는가?
그들의 글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서인가?
그들의 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진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기에 명상가가 존재한다고.
그러나 천만에!
명상가는 누군가 들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명상가가 쓰는 글은 상대를 전제 하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살아 있음의 징표이며 나아감의 의식이다.
그것은 흡사 혈액순환이다. 숨쉬는 것이고 박동하는 것이다!
명상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런 영향력이 있다.
허나 그것은 그들의 사랑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뿐이다.
우선은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쓰는 것이다.
제 안에 넘쳐나는 진리의 물을 길어 내는 것,
매 순간 신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길가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의식을 어쩌겠는가?
어느 새 빛처럼 새어 나와 감출 수 없는 그것을,
폭포수처럼 터져 나와 감당할 수 없는 그것을.
그래서 쓰는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사랑이 전달된다면 주위는 조금 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다음 문제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부분만을 받아 들였든, 왜곡하여 받아 들였든
그것은 쓴 사람과는 별 개의 문제다.
사실 존재의 근원에 절절히 매달려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그 진리를 온전히 소화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의 글은 왜곡되어 전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구원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말하는 것은 그리 탐탁한 일이 아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보다는 일찍이 같은 문제로 생을 불살라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소통이 훨씬 좋다.
단 한 사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가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치보다 크다.
천 사람의 왜곡된 동경보다 영혼이 통하는 단 한 사람과의 소통이 천만배는 더 즐겁다.
그럼에도 왜 쓰는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펄펄 살아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그들의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이상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이나 애정 문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되지 않는다.
종교인에게 그것이 배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이 사는 힘은 가족도, 친구도 아니며 결혼도, 사회적인 성공도 아니다.
매순간 신과의 대화, 오로지 그것 하나이다.
알아야 한다. 삶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길은 신과의 대화 뿐이다.
어떠한 글을 읽든, 대화를 하든 사랑을 하든 그 상대는 신이 되어야 한다.
먼저 제 안에서 신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 아닌 타인의 모습에서도 제 안에서 발견했던 신의 모습을 똑같이 발견해 내야 한다.
그때에야 너와 내가 비로소 같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야 너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비로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은 네가 나임을 깨달았을 때부터 시작된다.
네가 다름 아닌 바로 나임을 알았을 때
그때 비로소 가슴 속에서 울음 같은, 웃음 같은 사랑이 뭉클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로 가슴 먹먹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그렇게도 삶이 고단했던 것인데 네가 바로 나라니!
이 소식은 세상 천지가 온통 뒤바뀌고도 남을 만한 충격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생각해 본다. 과연 깨닫기 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해 무지했을까?
네가 나임을 모르고 사랑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때에도 네가 나인 것처럼 사랑했었고,
깨달은 것처럼 살아오고 있었다.
실패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성공해 있었으므로.
깨달음을 갈구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있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깨닫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다.-
말보다는, 글보다는 영혼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에 아로새겨진 사랑은 인간의 숙명이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선언은 한참 뒤에나 일어난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전히 심장은 뛰어야 했고 피는 돌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단지 삶이 아니다.
깨닫기 전에 가장 큰 꿈을 꾸었던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또한 가장 큰 꿈을 꾸게 된다.
물론 전 인류를, 우주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것이 명상가가 사는 방법이다.
언제 어느 때라도 가장 큰 꿈을 꾸는 것.
그렇다. 길을 나선 이상 개척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설사 죽고 난 뒤라 할지라도 이루어질 것을 안다.
깨닫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가운데 있음을 안다.
한 순간 한 순간 이미 그 꿈이 되어 있음을 안다.
그 꿈을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그 꿈 자체가 되어감을 안다.
그것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며, 곧 신이 이미 이루어 놓았음을 아는 것이다.
가장 큰 사랑임을 아는 것이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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