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주춧돌 없는 기둥이나 서까래는 있을 수 없다.
기초 공사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설계도 없는 집도 있을 수 없는 법.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허무하다.
아등바등 살아 보지만 기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 허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다 큰 이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 간다고 자부하는 생활인의 실패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두려움 때문이다.
진 것을 버려야 하는 부담감,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 책임감 등에서 그것은 기인된다.
그리하여 문제를 회피하거나 답을 회피하는 행태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 없이, 완전에의 깨달음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의 완성을 꿈꾸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고서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무모함과 다를 바 없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의 완성은 차라리 찰나주의에 가깝다.
완전에의 깨달음이 바로 사랑에의 그것과 같고,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이 또한 그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하려 한다.
사랑과 우정 중 선택하려 하고, 아가페와 에로스 중 선택하려 한다.
더 큰 가치와 일상의 완성 중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틀렸다. 그것은 본래 하나인 것이다.
이것과 저것 중 선택하려는 것은 이분법에 의한 그릇된 자세이다.
그것은 선택하여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선택은 다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눌 때에 쓰이는 것이다.
조금 더 완전에 가까운 것과 조금 더 먼 것을 나눌 때에 유효한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에,
나아갈 길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에 한해 국한된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일이다.
가령, 정치적인 노선을 결정할 때에는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현실의 안위가 아닌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선택은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결혼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위한 기초공사가 되어야 한다.
직업은 선택으로써 가능한 일이지만
그 선택으로 하여 보다 더 큰 가치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그 선택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택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는 식은
허무에 대한 도피가 될 뿐이다.
생존하기에 급급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흡사 밤하늘의 별을 길잡이로 항해하는 선원의 그것처럼
우리는 완전에의 이상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현실에서의 주춧돌과 이상에의 설계도는 하나이다.
일상의 완성이라는 현실의 선택과 큰 가치라는 이상에의 그림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선택은 참된 이상이 전제 되어야 한다.
대부분 현대인의 꿈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생존을 넘어선 그 무엇이 없기에 그들의 오늘 하루는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온전한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실의 선택에 치여 내일을 잃고 이상을 잃고 결국 스스로를 잃은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고 있는가, 오늘 하루 무엇을 선택하였나,
또한 그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가, 골몰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