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돼지들은 말한다.
“돈이 없는 사람은 꿈을 포기해야 하는 거야.
꿈은 먹고 살만한 자들이나 쫒는 거지.
넌 아직 세상을 모르는 구나! 쯧쯧.”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꿈이 없는 자, 죽은 자들이다.
지금 당신의 비참은 가난한 것이 아니고,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고,
그저 배부른 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먹고 사는 문제가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음으로써
아직도 인간이 아닌 돼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신은 당신을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비참은 결국 바로 그것이다.
신은 당신을 사랑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아니, 신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에게 있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 기복하는 일이 민망한 이유는 바로 그것!
그것은 인간이 일개 개미에게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의 입장에서 일개 벌레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
마찬가지로 신의 입장에서 당신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다.
아니, 존재조차도 아닌 그 무엇이다.
당신이 신을 믿거나 또한 열렬히 따른다고 해도
그것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통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가 있을 리 있는가?
어머니도 아기의 미소로 인해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것!
당신은 어떤 경우에 신이 미소 짓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의 기복은 그러므로 주인의 은혜를 바라는 노예의 마인드!
그렇다면 신이 당신의 삶에 긍정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당신 옆에 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신이 당신을 대화상대로 여길 만큼 당신 스스로 크게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란 바로 친구!
마치 친구처럼 신을 백퍼센트 이해할 수 있는 동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신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신이 되어 보아야 한다.
세상 모든 일을 신이 되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권력이 아니라 그의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의 주인공처럼 신의 권력을 탐한다면 실패다.
이 우주의 대표가 되어 세상을 운용한다는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그런 눈높이와 마음가짐이 자신의 눈빛과 언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
이 세계의 법과 규칙과 도덕에서 벗어나 다만 스스로 존재하여야 한다.
자신의 삶을 세상의 룰이 아닌 스스로의 룰로 선택하고 결정지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만은 당신을 알아 볼 것이다.
물론 세상의 바보들은 여전히 당신을 비웃을 테지만
신은 그런 당신을 향해 미소 짓는다.
그 신의 미소를 매순간 볼 수 있다.
신에게 의존하여 어리광부리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당연히 세상 어떤 권력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 어떤 보험과 저축으로도 살 수 없는 안정감이 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랑 놀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 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 없을 뿌듯함이 있다.
신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일개 인간의 비참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생의 가장 참된 가치이다.
배부른 돼지들이 자기 몫의 먹이를 찾느라 전전긍긍할 때
신과 연결된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의 기적에 전율할 것이다.
마침내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꿈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것은 신이 당신에게 선물한 기적!
마침내 신에게로 가는 여정이다.
당신의 그것처럼 당신의 꿈도 나날이 진화해야 할 것!
그렇다면 우리 그 꿈을 통해 신과 대등하게 만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꿈을 쫒을 수 있다고? 천만에!
그것은 당신의 핑계이며 변명일 뿐.
변명하지 말라!
핑계대지 말라!
당신의 생은 오로지 당신의 것이다.
나의 히로인은 당신이 보기에 세상을 모르는 바보!
그러나 세상은 눈치 보거나 비위 맞추거나 아부할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땅일 뿐이다.
인간이라 함은 세상에 굴복하여 꿈을 잃고 지배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다움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자라 신과 대화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