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왜곡을 운명으로 하고 있다.
‘나’라는 것이 단지 기억이라면 ‘나’의 실체는 없는 것이다.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따라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
가족이라는 것도 결국 자신의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왜곡되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
‘나’라는 것은 대체될 수 없어야 한다.
아니라면 내가 ‘나’의 복제인간인지
‘나’의 기억을 주입한 존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 사라지고 다른 존재가 ‘나’를 가장할 수 있는 것.
결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고로 그것을 깨닫지 못한 당신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허깨비 같은 목숨 이어가고 있다고 해서 ‘존재’는 아니다.
시간은 없는 것!
일 세기만 훌쩍 뛰어넘어 보면 당신은 사라지고 없다.
무엇으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식 혹은 족보라고 말하지는 말 것!
그것은 강아지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법 유명한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말하지도 말 것!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당신의 이름이지 당신 그 자체가 아니다.
당신은 사실 이름으로도, 재산으로도 결코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두려운 일, 허무한 일이 아닌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은 꼭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말이 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그토록 노력하는 그 모든 일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같잖은 일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존재’란 돈으로도 명성으로도 살 수 없는 것!
오직 일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만이 방법이다.
제 영역을 넓혀 불변의 존재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제 한 몸과 가족, 이 사회와 국가에 머물러 있는 생각을
이 지구와 우주, 그리고 신으로 넓혀가야만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운명은 사명이 된다.
비로소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된다.
‘깨달음’이란 그렇게 당신이 -마치 신처럼-존재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