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妙)어록2-단 한 번 크게 무너지고 싶다

신비(妙)어록2-단 한 번 크게 무너지고 싶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9. 8. 13. 03:30


결혼한 이들에게 “왜 결혼을 했는가?”하고 그 이유를 묻는다.

마치 그들이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 매번 묻듯이!

물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대답을 한다.

“날마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혹은 “사랑하니까!”

그러나 이는 오답 내지는 동문서답이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결혼제도를 전제로 하는 것인 반면

“왜 결혼을 했는가?”라는 질문은 그 전제가 없다.

왜 결혼제도를 선택을 했는가? 라는 한 차원 높은 이야기인 것이다.

당연히 뻔한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결혼제도를 선택(!)했을 리 없다는 이유로 이 질문은 패스!


뻔한 답 외에도 이 사회의 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므로

애초에 그 어떠한 선택권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물론 헤어지기 싫어 결혼한다는 말도 틀렸다.

그들 순진한 감정과는 상관없이 결혼하면 오히려 더 많이 헤어진다.

사실은 만나지도 못하면서 헤어지기만 하는 것이다.



이는 이혼 따위 이야기가 아니다.

점점 더 가까워짐으로써 오히려 멀어지는 것!

긴장이 이완되기 시작하면 관계는 조금씩 죽어간다.

관계가 죽어 가면 만나지 못하게 되고

만나지 못하면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옆에 있다고 하여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있다고 하여 다 만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함께 있으면서 혼자 있을 것인가?

만남은 혼자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신적으로 독립한 이만이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사랑은 누군가를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결혼은 결혼제도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니까 결혼한다는 말도 확실한 동문서답이다.

사랑은 제 영혼의 문제, 그의 바운더리와 일치하는가가 중요할 뿐!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너와 내가 만나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신처럼 존재하는 사랑을, 내 안에서 발견했다.

그러므로 나는 신처럼 광대해졌다.”라는 의미!

"너도 신처럼 광대해진다면 나랑 완전하게 포개어질 수 있다."라는 의미이다.



헤어지기 싫어 결혼했다는 이가 이런 생각을 했을 리 없다.

사랑하니까 결혼했다는 자도 마찬가지!

다만 기존의 그들 방식을 존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저 그들의 생을 추적해 볼 뿐이다.

과연 사랑했던 그들은 여전히 헤어지기 싫어 꼭 붙어 있을까?



천만에! 그럴 리 없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고 싶은 것이

대부분 눈 뜬 장님들의 간사한 마음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그들이다.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만을 믿는 그들이다.


"당신의 사랑은 아직도 유효한가?"

이런 순진한 질문은 그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다.

요즘은 개그맨들만 개그를 하지는 않는다.

결혼생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훌륭한 개그소재가 된다.

그들의 죽은 관계는 씁쓸하게도 개그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개그 안에서 그들은 곧잘 독립투사가 된다.

배우자가 집이라도 비울라치면 자주 광복을 맞기 때문이다.

또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비극적이게도 어느 한쪽은 이미 사랑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몇 년 만에 그들은 제 결혼생활을 웃음으로 환원시키는 코미디언이 돼버린다.


결국 헤어지기 싫어서 함께 했지만

이제는 실컷 함께 해봤으니 다시 헤어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는 그 죽은 관계를 당연한 것인 양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물론 되살리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죽은 관계는 살아나지 않는다.


스스로 죽인 것을 이제 와 다시 살리려는 아이러니!

관계는 세상 가장 약한 생명이다.

결단코 처음부터 죽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펄펄 뛰는 활어처럼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



그러므로 누구나 살인자(?)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전전긍긍하고, 만질 수 없으면 의심했을 것이다.

만나지 못하면 불안해하고 만나면 나태했을 것이다.

가질 수 없으면 안달하고 가지게 되면 시들했을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관계들을 죽이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는 게 다 그런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하기.

그것을 진리라 여기고 철든 어른처럼 굴기.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자위하기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기.

그러나 과연 그 이상의 생(生)이 없을까?


사람들은 혼자되는 것,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공포를 느끼지만

나의 히로인은 그 정반대의 경우라야만 비로소 불안감을 느낀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죽은 것!

함께함으로써 오히려 제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이고

소통하지 못함으로써 함께해도 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지 못하는 것!

당당히 한 세계의 주인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무지한 타인을 대하는 것이다.

그의 아킬레스건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혼자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안정감을 주는 어떤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최고의 불안감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나만 믿어라!" 가 아니라 "너를 믿는다!" 이다.

"나만 따라오면 돼!"가 아니라 "너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미래란 일말의 불안 혹은 공포!

그것은 그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무게를 지닌다.

그들에게 "나만 믿어! 나만 따라와."는 커다란 안정감이지만

나의 히로인에게 그것은 오히려 거대한 소외감 혹은 불안감이다.

그것은 세상 대부분의 마초들이 속물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히로인은 신의 길을 가는 자!

불확실한 미래나 가난한 형편 따위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신의 보상을 받은 이!

오히려 크게 무너질 기회가 그에겐 있다.

그것은 바로 크게 살아내는 것!



오로지 찬란한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혼자 감으로써 오히려 함께 갈 수 있고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영원할 수 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무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신의 편에, 진리의 편에, 역사의 편에, 진보의 편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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