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유방의 명장이었던 한신.
마침내 제왕에서 초왕으로 봉해졌던 그는 끝내 팽형으로 죽임을 당한다.
저 유명한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긴 채 끓는 기름 가마 속으로 들어간 그.
그 끔찍한 참형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물론 조선시대의 팽형은 실제로 삶아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식은 그대로 취해 가마 속에서 삶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는 팽형을 당한 자는 그로부터 죽은 사람이 되어
마치 유령인 듯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삭제된다.
이른 바 사회적 죽임을 당하는 것!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아무도 그를 만나러 오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를 아는 체 해선 안 된다.
사회적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다는 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죽은 것보다 못한 것!
비참하기로 치면 사형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존재감 없기로도 사형을 능가한다.
죽은 자는 차라리 존재감이 있는 법.
그를 기억하는 이들,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오히려 죽어서 사는 역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The Hairdresser's Husband, 1990)'의 마틸드가 죽은 것은
앙트완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2008)'의 한나의 사랑과 죽음은
마이클의 전 생애와 뜨겁게 만난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 누군가의 전 생을 관통하고
지울 수 없는 화인 하나 찍는다는 것!
그것이 누구에게나 오는 행운은 아니다.
범인들에게 그것은 마틸드나 한나처럼 죽음을 담보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의 팽형은 세상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도리어 인간적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 어떤 고통도 극복하지만,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는 '비참'만은 극복하지 못한다.
몸은 존재하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
세상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그래서 인간 최고의 비참.
인간은 존재감으로 살고,
소외감으로 죽는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가 세상과 함께 호흡할 때인 것이다.
세상에 발언권을 가지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
함께 호흡하며 앞으로 걸어 나갈 때!
바로 그때, 펄펄 살아 숨 쉴 수 있다.
누구보다 명징하게 존재할 수 있다.
외딴 별에 홀로 앉아서도 그 존재감 폭발할 수 있다.
인간은 존재감 하나로 사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 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神)의 호흡으로, 진리와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진보의 발걸음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길은,
역사라 함은,
진리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 비참을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마리 로랑생의 시를 자주 곱씹어 보곤 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잊혀 진 이는 죽은 이보다 비참하다.
바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팽형을 당한 자는 일생을 한탄과 절망 속에 살았을 것이다.
아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 뜬 유령의 삶, 죽음보다 더 한 죽음을 당한 자의 회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오로지 존재감 없는 자의 비애.
물론 현대에는 그런 이가 없다.
친구도, 직장동료도, 가족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수많은 인간 관계속의 당신이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천만에! 당신은 지금 이 순간도 삭제되어 가는 중이다.
가까이는 새로운 세대들에게서 꼰대라는 명목으로 삭제되고,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지 않는다면 역사의 목록에서도 삭제된다.
또한 진리와 함께 하지 않는 한 신의 목록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가 많아도, 자손이 번성해도, 지금 당장 이름 꽤나 알려져 있다고 해도
신의 호흡으로, 진리와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진보의 발걸음 걷지 않는 한
당신은 존재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냉정하게 묻노니, 당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