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곳은 서울이지만 또 서울이 아니었지.
산동네가 바로 코앞에 펼쳐진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동네.
장독대에 올라 담장 밖을 보면 세상이 온통 한 눈에 펼쳐지던 집.
야산과 주인 없는 무덤들, 오물쓰레기로 가득했던 벼랑 밑,
곳곳에 낭떠러지와 기암괴석, 그리고 작은 암벽들.
어린 나는 다람쥐처럼 그 모든 곳을 기어오르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녔어.
불빛 하나 없는 밤, 깜깜한 산길이 내겐 엄마 품이었지.
유일하게 나를 비춰 준 밤하늘의 별이 친구였어.
늘 함께 뛰어다니던 아이들과 헤어지면 자주 찾아갔던 곳,
오물 냄새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척박한 벼랑 끝은
아마 아버지의 근엄함 쯤 되었을 거야.
또 익숙하게 기어오르고 뛰어다니던 바위와 암벽들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놀이기구였지.
비오는 하굣길에 우산을 쓰고 바위벽을 타다 떨어져도
나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어.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벽은 내게
편안하고 푹신한 안락의자와도 같았지.
주인 없는 무덤들은 늘 요정처럼 속삭여주었어.
"안녕, 나의 친구!"
마당 끝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당시 아이들에겐 공포의 장소.
밤에 화장실 갈 때마다 함께 가자며 서로를 졸랐던 아이들.
쟤는 왜 혼자 가냐며 밤에 화장실 가는 나를 따라 나오셨던
지금은 돌아가고 안 계신 증조 할머니.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서운 게 많아.
어둠, 귀신, 무덤가, 밤, 화장실,
특히 밤에 가는 화장실.
그러나 어차피 혼자라면 세상에 무서운 건 없는 법이지.
사람들이 그리도 무서움을 타는 것은
바로 옆에 엄마와 아빠가 있기 때문이야.
그들이 언제나 자신을 안아주고 보호해주고 지켜주기 때문이지.
언제라도 엄마나 아빠나 형이나 누나가
짱가처럼 나타나 위험에 빠진 자신들을 구해주기 때문이야.
그래서 갑자기 혼자가 되면 무서운 거야.
보호해줄 이 없으니 두려움이 엄습하는 거야.
그들은 혼자이기 때문에 무서웠던 게 아니라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무서웠던 거야.
결국 아무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언제나 엄마나 아빠가 자기 옆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이곳이 영원한 나의 홈그라운드가 아닌 것을 안다면,
인간이란 어차피 혼자! 라는 것을 안다면,
애초 두려움 따위 생기지 않아.
그저 이방인이 돼버리는 거야.
늑대 무리에서 함께 뛰노는 늑대소년이 되는 거야.
그런 이는 아기 때부터 두려움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아
이미 홀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
세상에 혼자인 것 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어.
삶 앞에 철저히 혼자 버려지는 게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
가장 두려운 것이 이미 삶 자체가 되었는데
어둠이나 귀신이 새삼 두려울 수는 없지.
남들이 무서워하는 것에 그저 심상할밖에.
아이 때부터 혼자였던 아이는 그렇게
이미 홀로 신(神)에 다가갔던 거야.
진정 어머니는 신이고,
아버지는 대지였던 거야.
은둔은 사람이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사람들과의 만남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더욱
소소한 사정을 일일이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자질구레한 일상을 나누고 싶지는 않아.
나는 성사를 원하지 일상을 원하지 않아.
그것은 나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 신의 일에 골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요즘도 그 높은 동네의 산길,
그리고 어릴 적 살던 집이 꿈속에 나오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별에 대한 기억!
마침내 나의 히로인이 태어나게 된 것도
다 그 높은 벼루 같은 동네 때문이었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자연!
특별히 절경이 아니어도,
그저 황폐한 버려진 땅이어도
나는 그것이 신의 모습인 것을 알아.
신은 결코 티벳이나 히말라야에만 있지는 않아.
오히려 가장 냄새나고 더러운 산동네에 있지.
주인 없는 무덤가,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바위벽에 있어.
주인 없이 버려져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무덤가에 있어.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야산에 있어.
그 길을 홀로 걸어가던 7살 아이의 가슴 속에 있어.
바로 너의 가슴 속에 씨앗처럼 숨 쉬고 있어.
안녕, 늑대소년!
누구나 어린 시절엔 늑대소년이었지.
아니, 어쩌면 나혼자만이 늑대소년일지도.
너의 늑대소년은 잘 살고 있니?
아니 아직 살아있긴 한 거니?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