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 웃으며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서퍼.
내게 생이란 그 서퍼를 찍은 한 장의 사진과도 같다.
그 사진의 이미지는 20살 시절 발리의 꾸따 해변에서부터 시작된다.
또한 영화 폭풍 속으로(Point Break, 1991)에서 무성하게 자라나
몇 년 전 홀로 타 도시로 서핑 여행을 떠나면서 정점을 찍는다.
방황하는 청춘이던 내게 커다란 치명타를 안겨주고
바람처럼 가버린 패트릭 스웨이지(1952-2009).
그곳에서 오로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처음으로 파도를 탔지만
나는 키아누 리브스보다 패트릭 스웨이지에 가깝다.
그는 영혼의 선동자!
걸어 다니는 송장들에게 여전히 Fuck you!를 날리고 있다.
펄펄 살아서 날뛰고 있다.
폭발할 듯 부글부글 끓고 있다.
활어처럼 펄떡이고 있다.
영혼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
나의 히로인이 영혼의 로커이듯이,
나의 히로인이 영혼의 서퍼이듯이,
그도 지난 20년간 여전히 영혼의 독립국이었다.
다시 만난 그는 펄떡이며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나라가 없다.
나의 히로인처럼 그도 혼자였다.
개인뿐 아니라 시대가 펄펄 끓어야 한다.
시대와 함께 개인이 펄떡여야 한다.
그럴 때 폭풍 속으로 사라진 그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신비(妙)어록은 내 생의 보고서이다.
나의 삶을 타인의 생을 보듯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한
생의 탐구서이자 최초의 인간 선언!
당신도 인간선언을 서둘러야 한다.
죽은 시대가 가면 반드시 열정의 시대가 온다.
그럴 때 당신도 여기 살아있노라, 손을 흔들어야 한다.
송장들 사이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었노라,
신호를 보내야만 한다.
신(神)은 언제라도 그런 인간을 찾는다.
나의 히로인이 신과 친구 된 사연이다.
신과 함께 세상을 도모하는 연유이다.
인생의 비극은 생을 대상화하는 데서 온다.
펄펄 끓는 에너지는 단지 생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생 그 자체가 되는 것에서 온다.
리버피닉스처럼 단지 길의 감식자뿐 아니라
길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패트릭 스웨이지처럼 파도의 탐구자뿐 아니라
파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단지 깨달음을 얻고자 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둘러 다가가서 구걸하지 말 것.
거지처럼 얻고자 할 때 보물은 사라진다.
자연을 정복하고자 할 때 자연은 거대해진다.
깨달음을 탐할수록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가까이 다가가 생을 옥죌수록 생은 저만큼 멀리 달아난다.
그대 그대로 굳어 화석이 된다.
인간들이 하는 그 모든 행위는 결국
살아 있음을 절절히 느끼려는 발버둥에 다름 아닌 것.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면 오르페우스처럼
결코 안절부절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맹렬하게 살아 숨 쉬려면 결코 지분거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대 빛을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갈수록
그대의 에우뤼디케도 함께 살아 숨 쉴 수 있다.
오르페우스 한 몸에 에우뤼디케의 생사가 달린 것처럼
그대 한 몸에 이 우주의 생사가 달려 있다.
그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이후 그대의 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이 바로 그대가 펄펄 살아 숨 쉬는 유일한 방법.
더 이상 돈으로, 명성으로, 권력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살아 숨 쉬려면 그렇게 우주 그 자체가 되는 수밖에 없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