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3
만약 내 글을 읽어 줄 단 한 사람의 독자도 없다면
그때에도 계속 글을 쓸 것인가?
이런 가정이 있을 수 있겠다.
내 대답은 간단하게도 ‘Yes' 다.
물론 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는 그 생각들을 기록하지 못해
놓쳐 버리면 안 되기 때문!
당연히 글을 읽을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인간을 상대하진 않는다.
적어도 신만은 나를 알아볼 것이란 생각이 있다.
혹시라도 있을, 그 신과 같은 시선의,
미지의 누군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있다.
100년 뒤, 200년 뒤, 300년 뒤 아니, 나는 영원을 생각한다.
미래에도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나
종교학자, 명상가, 예술가들은 있을 것이란 생각.
그것을 또한 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런 생각이 지금 이 순간 온몸의 세포를 깨어나게 한다.
설핏 스치는 생각의 줄기를 잡아채 그 뿌리를 캐어내는 것,
그 뿌리내렸던 땅과 그를 살찌게 했던 햇살까지
모두 어우러져 한바탕 꿈이 되는 것.
그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면
나의 시나리오에선 매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시나리오를 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축이다.
관객을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매력!
질컥거리고 끈적거려서는 그들의 마음을 끌 수 없다.
핑계대고 변명하고 지질거리면 도망간다.
관객은 연약하다. 달라붙어 못살게 굴면 질식사 한다
또한 냉정해서 어설픈 구애로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이다. 신을 유혹할 마음가짐이 아니면 실패다.
관객을 모독할 작정이 아니라면 쿨해야 한다.
가장 쿨한 것이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나의 히로인은 다른 인간에 일체 관심이 없는 대신
인간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연애에 관심이 없는 대신, 사랑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누군가의 기쁨이나 고통대신 그의 천재에 관심이 있고
프로필 대신 그의 정신에 관심이 있다.
열등감은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장대하게 키워야 할 것.
열등감을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는 페어 플레이어fair player다.
그러므로 져도 진 것이 아니다.
매순간 새로 시작하므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이 독립되어 있다.
당연히 변명할 필요도 없다.
뭣 하러 인간을 상대로 긴 말 하겠는가?
바로 신과 담판 지으면 되는데.
전쟁에 이기려면 적의 왕을 끌어내려야 하고
회사를 접수하려면 주주총회를 장악해야 하는 법.
결코 일개 병사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말단 사원에 힘 빼지 않는다.
또한 함부로 친한 척 하지도 않는다.
친구라는 이유로 그의 집에 쳐들어가지 않으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방에 쳐들어가지 않는다.
가족이니까 허용되고 친구니까 봐주고 그런 거 없다.
오래 사귀었다고 더 친하고 처음 봤다고 내숭 떨고 그런 거 없다.
그에게 정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로봇이 인간되길 기다리는 게 낫다.
그는 오로지 자기 삶의 원작자이다.
오늘도 어둠 속에서 홀로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
그를 알아주는 이 없다 해도 슬퍼하는 일 따윈 없다.
그에겐 비장의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은 자식 같은 마속을 참하며 울었다던가.
나의 히로인은 거치적거린다면
제 손으로 제 심장이라도 꺼낼 위인이다.
그저 신의 눈높이로 자신의 영화를 바라볼 뿐!
가끔 너절한 장면을 부탁하는 관객도 있지만
그건 나의 히로인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찍는 실수를 범한다면
차라리 제 영화 속으로 뛰어 드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무심히 주인공 옆을 스쳐 지나는
어느 경찰관의 총이라도 빼앗아들고 뒷골목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또 태연하게 앉아 ‘액션!’을 외칠 것이다.
너절한 장면은 매력 없는 인물이 만드는 것.
물론 매력 없는 인물도 엄연한 안타고니스트로서
주인공을 부각시킬 역할을 부여받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악역이나 조연이나 단역조차도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크든 작든 각자 자기별의 대표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험한 숲길이나 산길을 가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는 그 장면을 하늘 높이에서 부감으로 잡는다.
영화 얼라이브(alive, 1993)에서 생존자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 환희에 차고 어쩌면 거룩하기까지 한 부감촬영 말이다.
각 부감 샷은 저마다에 어울리는 촬영기법이 있다.
반가운 친구끼리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일 때는
각자의 개성이 잘 묻어나도록 각각의 포즈를 살려 찍어야 한다.
그리운 친구를 만났을 때는 가까운 높이에서
미세한 표정이 그대로 살아나도록 찍고
감정이 배제된 군중 속 주인공의 우아한 미소는
부감 외에도 주위의 배경과 군중의 표정도 슬로우로 잡아 주어야 한다.
그런 장면에 필수적인 것은 분위기를 고조시켜줄 배경음악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나탈리 머천으로 시작되는
어느 멋진 날 ost가 필요하다.
하늘거리는 흰색 커튼과 그 사이로 비춰드는 햇살이
꿈결로부터 아침으로 한결 자연스럽게 건너오게 해준다.
나른한 여름 오후에는 청량한 조지 윈스턴이나
쿨한 제리 라퍼티Gerry Rafferty.
좋은 친구 만나 술 한 잔할 때는 이문세 5집
혼자 운전할 때는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In dreams.
비 오는 오후에는 리 오스카Lee Oskar의 하모니카 연주.
커피 향 짙은 재즈카페에서는 게리무어Gary Moore의 초강력 감성에너지.
아무 생각 없이 고개 끄떡이며 음악을 즐기고 싶을 땐 신예, 빅뱅도 좋다.
생의 매 순간 영화를 볼 수는 없지만 생의 매순간 영화를 만들 수는 있다.
단 한 순간의 장대한 영화, 단 한 편의 짧은 영화를!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