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45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추석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바람은 점점 서늘해지고 반월은 점차로 온전한 보름달이 되어 가고 있다.
아마도 내 친구들의 눈빛 또한 저 달빛과 함께 더욱 깊어질 것이다.


아마도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되려는 반월처럼, 나비가 되려는 애벌레처럼
언젠가는 그 꿈이 실현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반월이나 애벌레의 꿈은 언젠가는 실현될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고
신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이다.


꿈이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았음을, 이미 이루어 놓았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신의 완전성을 빌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소극적 의미에서의 재현이 개인의 자유라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재현이 전 인류에의 소통이다.


시공을 초월해 점차 그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어차피 ‘인류에의 소통’은 ‘개인의 자유’의 연장선 상에 있지만,
사랑이라는 그 속성으로 인해 소통이라는 방법으로 자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개인이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소통할 수 없을 때에 곧 일정한 영역 안에 갇히게 된다.
갇힌 자유라면 자유가 아니다.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당연히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개인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으며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감으로써 시공을 초월해 전 인류를 아우르는 것이다.


세상에 깨달은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는 신과 다름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도 신처럼 자기 자신과 꼭 닮은 생명을 창조해 낼 것이다.
진리로 소통할 수 있는 그의 자식(?)을 낳을 것이다.


깨달은 이가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신처럼 그들은 창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의 완전성이 바로 끊임 없는 창조이기 때문이고,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언뜻 불완전으로 오해 되기 쉬위나,
사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완전이다.
머물러 있는 완전이라면 이미 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물러 있는 완전이 완전이라면 완전한 신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세계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신은 또 다른 우주를 설계하러 떠났을 테니까.


보이는가? 저 하늘의 달이.
조금은 이지러진, 완전을 꿈꾸는 둥그런 달이.
저 달은 곧 채워질 것이고 완전한 보름달이 될 것이다.
보름달은 다시 반달로, 반달은
다시 초승달로 비워질 것이다.


비워진 것은 채워지고 채워진 것은 다시 비워질 것이다.
그것이 완전이다.
완전한 나비가 다시 알을 낳듯이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그것이 신의 완전성이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어디선가는 미워하고, 어디선가는 사랑할 것이다.
미워하는 그것도 결국은 사랑의 한 부분이듯이,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그 모든 것도 사실은 나아가는 것이다.


무언가의 시작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신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머물러 있지 않고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닮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사실 순간 순간 신이 우리를 방문하기 때문이다.
느끼는가? 신이 지금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있음을.



-신비(妙)  2004. 추석즈음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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