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재미없는 이야기
신라 향가 처용가를 보면 등장인물이 세 명 나온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들은 처용과 아내, 그리고 역신이다.
그러나 그들 중 둘만이 인간이고 나머지는 그렇지가 못하다.
역신은 물론 사귀(邪鬼)이고, 처용은 일단 동해 용왕의 아들!
그러면 이들 중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어쨌든 전해 내려오는 처용가로는 처용과 역신은 인간이다.
처용가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인 아내는 내보기엔 영 아니올시다!
아내라는 인물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저 처용의 것이었다가 역신에게 빼앗긴 물건정도로 나올 뿐.
뒷얘기로도 아내의 의지나 판단이나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외간남자와 정사를 벌인 아내라면 그 어떤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내는 남편인 처용과의 관계, 자신을 흠모한 역신과의 관계.
등장인물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주인공이다.
팜므파탈이 되어도 모자랄 여인이 그 존재조차 미미하고
오히려 그 어떤 관계에서도 인간이 되는데 실패하고 있다.
관계 맺을 필요 없는 처용과 역신이 관계를 맺는 아이러니라니.
아니, 처용과 역신의 관계를 위한 포석 정도인 아내의 존재감이라니!
용의 아들이나 요사스런 귀신은 인간이 될 수 있으나
정작 인간인 아내는 가구나 그림자나 물건이나 개나 소나 마찬가지.
하여간 처용가에는 이래저래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허무한 진실이 있다.
그 환영 같은 아내에게는 웅녀가 먹었던 쑥과 마늘을 선물해 주기로 하고
어쨌거나 처용에게로 포커스를 맞추면, 그가 AB형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만약 당신이 처용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A형 방식으로 소심하게 밤새 애꿎은 문고리만 잡고 벌을 설 것인가,
아니면 B형 역할처럼 첫날밤 신방 들여다보듯 훔쳐보며 즐길 것인가,
아니면 O형 모양새대로 이판사판 결판을 낼 것인가!
하여간 우리 역사 속의 처용은 뭘 좀 아는 양반이긴 하다.
내가 처용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적어도 그 장소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지금쯤 어디 가서 술 한 잔 걸치며 허허 웃고 있겠지!
비장의 카드를 가졌으니 야릇하고도 허허로운 웃음을 웃으리라.
물론 비장의 카드란 말 그대로 숨겨진 카드, 비밀의 카드다.
세상에 고수는 존재하고, 그의 아내가 그런 절대고수이지 말란 법은 없다
알아도 모르는 척, 속 깊은 그릇이 되어야지 드러내면 유치해진다.
만약 처용이 자신의 카드에 대해 섣불리 고수 아내에게 들킨다면?
주도권을 쥔답시고 자신의 카드를 슬쩍 보여주는 우를 범한다면?*
자신의 카드소멸과 동시에 아내에게 더 큰 카드를 내밀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여간 이건 결혼 생활의 지속 여부나 사랑과는 관계없는 얘기다.
그런 시추에이션에서 그 카드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고수아내의 방법은?
당연히 있다. 물론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아는 문제!
무조건 머리 굴린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게 되었다고 아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며, 설사 이론을 가지고 있다 치더라도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 라는 것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실은 매 순간 순간이 바로 '그 때'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자기 세계가 확고해야 하고 다른 세계와 당당히 교류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
하여간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그 보다 더 상위의 카드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 카드를 가져 주도권을 쥘 수 있는가가 문제로 될 뿐!
자칭 깨달았다, 말 많은 사람도 사실 하는 짓을 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비장의 카드가 있는지 없는지, 주도권이 뭔지 알고는 있는지,
아니면 주도권도 없으면서 천지분간 못하고 입만 살았는지 말이다.
병법이 별건가? 이기면 되는 거다. 하지만 싸우려고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이길 수밖에 없도록 자신의 세계를 미리 완벽하게 셋팅해 놓아야 하는 것!
그러면 져도 이기고, 이겨도 이기고, 싸워도 이기고, 안 싸워도 이긴다.
마지막으로 역신에게도 애정을 좀 나눠주자면, 그는 좀 매력 없는 조연이다.
혹자는 관대한 혹은 초탈한 처용에게 감복하여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였다지만
내 영화에서라면 그리 길이길이 남을 굴욕적인 선택은 하지 않는다.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여 사랑을 나눴다면 그건 아내와 역신만의 문제!
아내가 처용의 소유물도 아니고 어찌 처용에게 사죄하는 초딩짓을 하는가.
하여간 어설픈 마초들이 어설프게 의리 따지고 남자랍시고 떠세다.
내 시나리오에서라면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철딱서니 마초는 없다.
웃기지도 않는 남자대 남자의 대화나 결투 따위도 없다.
아내는 섹시한 이름을 가진 당당한 팜므파탈로 거듭날 테고
역신은 사랑에 목숨 거는 우직하고도 말없는 사내로
처용은 신선이 되어 날아갈 듯한 미모의 풍류남아로 그렸을 것이다.
바람피우고도 당당한 팜므파탈 아내를 변함없이 대했을 것이며
역신의 존재를 알고도 모르는 척, 묵인 아닌 묵인을 했을 것이다.
역신 역시 그리 쉽게 아내를 떠날리 없는 우직한 사내.
급기야 음흉한 처용의 속내를 눈치 챈 뻔뻔한 아내는
그야말로 뻔뻔하게도 세 사람의 여행 내지 동거를 제안했을 수도 있다.
역신이라면 잠시 괴로워하지만 나름대로 룰을 정하려고 했을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처용이라면 뭐든 허용하되 스스로는 거기에 매이지 않을 것 같다.
마치 그림처럼, 유령처럼 그렇게 담백하게 투명하게 존재할 것만 같다.
하여간 각각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므로 이야기는 점점 더
점입가경, 형편 무인지경이 될 것이다.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세 사람 다 그대로 물러설 위인들이 아니란 것쯤 당신도 이미 눈치채지 않았나?
처용은 시종일관 고고하고 푸근한 승자의 모습으로 존재 하며,
아내 또한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전히 웃고 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승자일까? 그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의 몫일 거다.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또 그것이 반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승자, 패자를 떠나 마지막엔 관객들도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물론 어이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관객도 있겠지만!
반면 역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아마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세 사람 중 누가 신선이 되어 날아가든, 시종일관 미소를 짓든
깨달음을 얻든 간에 그것은 그들의 삼각관계와는 상관없는 문제!
그들은 각자 홀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섹시한 아내는 더욱 우아한 미소로 처용을 바라볼 것이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우직한 멋쟁이 역신과 풍류남아 처용은
가끔씩 얼굴을 보는 진정한 친구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남자대 남자의 결투를 통해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다 벗고 만났으니
또한 남자 대 여자로서만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만났으니
세 사람이 지금까지 함께 만나며 재미나게 웃고 떠들지 누가 알겠는가?
하여간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몫의 이야기를 완성해야 하는 것!
작가도 따로 없고 감독도, 배우도 따로 없다.
다만 삶은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는 신화가 될 뿐. - 신비(妙)
*
-물론 여기서 하수아내는 논외다. 하수는 그냥 발발 떨며 알아서 기겠지!
-또한 웬만한 여자라면 그 카드 슬쩍 내밀지 않아도 자신의 위기를 직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