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새로 장만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전화번호를 정리한다.
그 와중에 내게 필요한 이와 필요 없는 이가 가려진다.
물론 전자는 살아남고 후자는 폐기되기 마련이다.
내 전화기에 상대방의 전화번호가 있다는 것!
그것도 여분이나 구색이 아니라 가장 먼저 마음이 가는 번호가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내게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존재일 것이다.
그런 번호는 물론 존재 자체로 의미가 된다.
매일 전화하지 않아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 즉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블로그를 새로 열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혹은 필요한 사이트를 우선 링크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연결을 끊기도 한다.
전화기에서 상대의 번호를 지워버리기도 하고
즐겨찾기에서 어떤 사이트를 아예 삭제할 때도 있다.
링크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체가 바로 그것!
그것만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인간에게 위안이 될 뿐.
만약 내게 꼭 필요한 이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낙담을 하게 될 것인가?
끈 떨어진 연이라는 말이 있다.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도!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 신과 떨어진 인간만 하겠는가?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무대를 떠난 배우?
아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조국을 등지고 떠나는 망명자라 한들 그 만큼 비참할 리 있겠는가?
근원이 없기로는 엄마 잃은 아기, 혹은 기억상실자의 그것!
인간은 누구나 벼랑 끝에 서 있다.
그것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 일뿐. 아니,
그 아슬아슬한 곳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서 있느냐,
아니면 떨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들러붙어 있느냐 이다.
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할 일이다.
아니, 눈을 감고 허공을 향해 한 발 내딛을 일이다.
안주하는 자는 모른다.
돈에 명성에 그 안락에 맛들인 자는 제가 서 있는 그곳이 벼랑인 줄 모른다.
그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행여 놓칠세라 콱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한 편 마침내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그저 가볍게 날아오른 자!
텅 빈 허공을 향해 한 발 내딛은 자 역시 그 허허로움에 중독되긴 마찬가지다.
확실한 건 인간은 그렇게 생의 영역을 넓혀간다는 것이다.
고립된 나만의 공간에서 타인까지의 공간으로, 또한 전 인류에의 공간으로.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더왕의 그것처럼 제 영혼의 지도를 넓혀가는 것!
나의 히로인의 전화기에는 신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언제든 단축번호 0번만 누르면 곧 바로 그와 연결되는!
물론 신의 전화기에도 그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날마다 세상 끝, 벼랑 끝에 서서 아슬아슬 존재해도
나의 주인공이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 이유라 하겠다.
‘이해해’라는 말은 삼가야 한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같은 경험’이라는 전제가 있을 때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 그럴 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다.
이미 서로 간에는 길이 닦여져 있어 굳이 너와 나로 가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없을 때의 언어란
언제나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 죽어버린다.
언어는 홀로 살아 반짝거리되
서로에게 녹아들어 관계의 상승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우리들을 패배자로 삼는다.
한 인간이 또 다른 한 인간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기적!
바로 신의 완전성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설픈 감정으로 오버하지 말아야 한다.
호들갑 떠는 일의 대부분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깊은 허무는 소리 없이 다가온다.
-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