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8:34

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완전한 사랑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만남을 담보로 한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듯이 그것은 두 세계가 온전히 소통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왜 만남이어야 하는가?

사랑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두 세계를 연결하여 공명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하나 되기 때문이다.


그 떨림이 우리의 세포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만남의 순간이 우리의 욕망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최초에 완전한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신은 인간을 재현했다.

그러므로 모든 완전은 신과 인간의 만남처럼 완전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완전한 신도 인간을 재현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있다.

만나지 못한 자유는 그런 까닭에 완전할 수 없다.

어느 순간 그 자유는 일정한 영역 안에 갇히고 만다.

필시 만남을 꿈꿀 수 밖에 없다.


소통되지 못한 개인의 자유는 만남으로 인해 소통을 이루고

그 소통은 곧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온전하게 만났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비로소 삶의 궁극과 만날 수 있다.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자유가 수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은 까닭이다.

신은 우주와 완전한 사랑을 한다.

매 순간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시도한다.

완전한 소통을 시도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그 어떤 만남의 순간에도 우리도 마치 신처럼 완전을 욕망하다.


신의 완전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신의 완전성을 내 몸에서 재현하는 것이 건강이요,

내 정신에서 재현하는 것이 자유라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이 사랑이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완전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완전한 자유는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기에 깨달음이 전제된다.

깨달음이 바로 시작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8:10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주춧돌 없는 기둥이나 서까래는 있을 수 없다.
기초 공사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설계도 없는 집도 있을 수 없는 법.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허무하다.
아등바등 살아 보지만 기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 허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다 큰 이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 간다고 자부하는 생활인의 실패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두려움 때문이다.
진 것을 버려야 하는 부담감,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 책임감 등에서 그것은 기인된다.
그리하여 문제를 회피하거나 답을 회피하는 행태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 없이, 완전에의 깨달음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의 완성을 꿈꾸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고서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무모함과 다를 바 없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의 완성은 차라리 찰나주의에 가깝다.


완전에의 깨달음이 바로 사랑에의 그것과 같고,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이 또한 그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하려 한다.
사랑과 우정 중 선택하려 하고, 아가페와 에로스 중 선택하려 한다.
더 큰 가치와 일상의 완성 중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틀렸다. 그것은 본래 하나인 것이다.
이것과 저것 중 선택하려는 것은 이분법에 의한 그릇된 자세이다.


그것은 선택하여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선택은 다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눌 때에 쓰이는 것이다.
조금 더 완전에 가까운 것과 조금 더 먼 것을 나눌 때에 유효한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에,
나아갈 길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에 한해 국한된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일이다.


가령, 정치적인 노선을 결정할 때에는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현실의 안위가 아닌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선택은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결혼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위한 기초공사가 되어야 한다.
직업은 선택으로써 가능한 일이지만
그 선택으로 하여 보다 더 큰 가치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그 선택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택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는 식은
허무에 대한 도피가 될 뿐이다.
생존하기에 급급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흡사 밤하늘의 별을 길잡이로 항해하는 선원의 그것처럼
우리는 완전에의 이상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현실에서의 주춧돌과 이상에의 설계도는 하나이다.
일상의 완성이라는 현실의 선택과 큰 가치라는 이상에의 그림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선택은 참된 이상이 전제 되어야 한다.


대부분 현대인의 꿈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생존을 넘어선 그 무엇이 없기에 그들의 오늘 하루는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온전한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실의 선택에 치여 내일을 잃고 이상을 잃고 결국 스스로를 잃은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고 있는가, 오늘 하루 무엇을 선택하였나,
또한 그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가, 골몰해 볼 일이다.

Posted by 신비(妙)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57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깨달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는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여

의심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아
순수한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엄마이다.

엄마와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그처럼 천진난만한 것이다.

 

깨달은 이는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듯이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순수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처럼 독립적이어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보호받지 않고,
어리광부리지 않아
고독한 것이다.


어른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신이다.

신과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독립하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이처럼 홀로 고독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엄마와 대화하고

어른은 신과 대화한다.


진정한 어린이는 엄마와 완전히 통하고
진정한 어른은 신과 온전히 통한다.


깨달음은

비로소 온전한 아이와 온전한 어른이

하나 되는 것.

내 안의 아이와 어른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아이의 천진함과 어른의 고독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엄마의 완전성을 의심하지 않는 아이처럼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그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그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다.


신을 배재한 사랑은

엄마를 잃은 아이의 그것과 같다.


Posted by 신비(妙)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45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추석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바람은 점점 서늘해지고 반월은 점차로 온전한 보름달이 되어 가고 있다.
아마도 내 친구들의 눈빛 또한 저 달빛과 함께 더욱 깊어질 것이다.


아마도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되려는 반월처럼, 나비가 되려는 애벌레처럼
언젠가는 그 꿈이 실현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반월이나 애벌레의 꿈은 언젠가는 실현될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고
신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이다.


꿈이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았음을, 이미 이루어 놓았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신의 완전성을 빌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소극적 의미에서의 재현이 개인의 자유라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재현이 전 인류에의 소통이다.


시공을 초월해 점차 그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어차피 ‘인류에의 소통’은 ‘개인의 자유’의 연장선 상에 있지만,
사랑이라는 그 속성으로 인해 소통이라는 방법으로 자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개인이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소통할 수 없을 때에 곧 일정한 영역 안에 갇히게 된다.
갇힌 자유라면 자유가 아니다.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당연히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개인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으며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감으로써 시공을 초월해 전 인류를 아우르는 것이다.


세상에 깨달은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는 신과 다름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도 신처럼 자기 자신과 꼭 닮은 생명을 창조해 낼 것이다.
진리로 소통할 수 있는 그의 자식(?)을 낳을 것이다.


깨달은 이가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신처럼 그들은 창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의 완전성이 바로 끊임 없는 창조이기 때문이고,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언뜻 불완전으로 오해 되기 쉬위나,
사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완전이다.
머물러 있는 완전이라면 이미 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물러 있는 완전이 완전이라면 완전한 신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세계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신은 또 다른 우주를 설계하러 떠났을 테니까.


보이는가? 저 하늘의 달이.
조금은 이지러진, 완전을 꿈꾸는 둥그런 달이.
저 달은 곧 채워질 것이고 완전한 보름달이 될 것이다.
보름달은 다시 반달로, 반달은
다시 초승달로 비워질 것이다.


비워진 것은 채워지고 채워진 것은 다시 비워질 것이다.
그것이 완전이다.
완전한 나비가 다시 알을 낳듯이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그것이 신의 완전성이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어디선가는 미워하고, 어디선가는 사랑할 것이다.
미워하는 그것도 결국은 사랑의 한 부분이듯이,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그 모든 것도 사실은 나아가는 것이다.


무언가의 시작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신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머물러 있지 않고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닮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사실 순간 순간 신이 우리를 방문하기 때문이다.
느끼는가? 신이 지금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있음을.



-신비(妙)  2004. 추석즈음


Posted by 신비(妙)

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23



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명상가는 왜 글을 쓰는가?
그들의 글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서인가?
그들의 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진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기에 명상가가 존재한다고.


그러나 천만에!
명상가는 누군가 들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명상가가 쓰는 글은 상대를 전제 하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살아 있음의 징표이며 나아감의 의식이다.
그것은 흡사 혈액순환이다. 숨쉬는 것이고 박동하는 것이다!


명상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런 영향력이 있다.
허나 그것은 그들의 사랑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뿐이다.


우선은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쓰는 것이다.
제 안에 넘쳐나는 진리의 물을 길어 내는 것,
매 순간 신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길가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의식을 어쩌겠는가?
어느 새 빛처럼 새어 나와 감출 수 없는 그것을,
폭포수처럼 터져 나와 감당할 수 없는 그것을.


그래서 쓰는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사랑이 전달된다면 주위는 조금 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다음 문제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부분만을 받아 들였든, 왜곡하여 받아 들였든
그것은 쓴 사람과는 별 개의 문제다.


사실 존재의 근원에 절절히 매달려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그 진리를 온전히 소화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의 글은 왜곡되어 전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구원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말하는 것은 그리 탐탁한 일이 아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보다는 일찍이 같은 문제로 생을 불살라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소통이 훨씬 좋다.
단 한 사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가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치보다 크다.


천 사람의 왜곡된 동경보다 영혼이 통하는 단 한 사람과의 소통이 천만배는 더 즐겁다.
그럼에도 왜 쓰는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펄펄 살아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그들의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이상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이나 애정 문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되지 않는다.


종교인에게 그것이 배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이 사는 힘은 가족도, 친구도 아니며 결혼도, 사회적인 성공도 아니다.
매순간 신과의 대화, 오로지 그것 하나이다.


알아야 한다. 삶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길은 신과의 대화 뿐이다.
어떠한 글을 읽든, 대화를 하든 사랑을 하든 그 상대는 신이 되어야 한다.
먼저 제 안에서 신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 아닌 타인의 모습에서도 제 안에서 발견했던 신의 모습을 똑같이 발견해 내야 한다.
그때에야 너와 내가 비로소 같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야 너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비로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은 네가 나임을 깨달았을 때부터 시작된다.
네가 다름 아닌 바로 나임을 알았을 때
그때 비로소 가슴 속에서 울음 같은, 웃음 같은 사랑이 뭉클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로 가슴 먹먹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그렇게도 삶이 고단했던 것인데 네가 바로 나라니!
이 소식은 세상 천지가 온통 뒤바뀌고도 남을 만한 충격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생각해 본다. 과연 깨닫기 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해 무지했을까?
네가 나임을 모르고 사랑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때에도 네가 나인 것처럼 사랑했었고,
깨달은 것처럼 살아오고 있었다.


실패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성공해 있었으므로.
깨달음을 갈구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있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깨닫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다.-
말보다는, 글보다는 영혼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에 아로새겨진 사랑은 인간의 숙명이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선언은 한참 뒤에나 일어난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전히 심장은 뛰어야 했고 피는 돌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단지 삶이 아니다.
깨닫기 전에 가장 큰 꿈을 꾸었던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또한 가장 큰 꿈을 꾸게 된다.
물론 전 인류를, 우주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것이 명상가가 사는 방법이다.


언제 어느 때라도 가장 큰 꿈을 꾸는 것.
그렇다. 길을 나선 이상 개척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설사 죽고 난 뒤라 할지라도 이루어질 것을 안다.
깨닫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가운데 있음을 안다.


한 순간 한 순간 이미 그 꿈이 되어 있음을 안다.
그 꿈을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그 꿈 자체가 되어감을 안다.
그것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며, 곧 신이 이미 이루어 놓았음을 아는 것이다.
가장 큰 사랑임을 아는 것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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