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완전한 사랑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만남을 담보로 한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듯이 그것은 두 세계가 온전히 소통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왜 만남이어야 하는가? 사랑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두 세계를 연결하여 공명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하나 되기 때문이다.
그 떨림이 우리의 세포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만남의 순간이 우리의 욕망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최초에 완전한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신은 인간을 재현했다. 그러므로 모든 완전은 신과 인간의 만남처럼 완전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완전한 신도 인간을 재현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있다. 만나지 못한 자유는 그런 까닭에 완전할 수 없다. 어느 순간 그 자유는 일정한 영역 안에 갇히고 만다. 필시 만남을 꿈꿀 수 밖에 없다.
소통되지 못한 개인의 자유는 만남으로 인해 소통을 이루고 그 소통은 곧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온전하게 만났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비로소 삶의 궁극과 만날 수 있다.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자유가 수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은 까닭이다. 신은 우주와 완전한 사랑을 한다. 매 순간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시도한다. 완전한 소통을 시도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그 어떤 만남의 순간에도 우리도 마치 신처럼 완전을 욕망하다.
신의 완전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신의 완전성을 내 몸에서 재현하는 것이 건강이요, 내 정신에서 재현하는 것이 자유라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이 사랑이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완전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완전한 자유는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기에 깨달음이 전제된다. 깨달음이 바로 시작이다. |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주춧돌 없는 기둥이나 서까래는 있을 수 없다.
기초 공사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설계도 없는 집도 있을 수 없는 법.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허무하다.
아등바등 살아 보지만 기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 허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다 큰 이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 간다고 자부하는 생활인의 실패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두려움 때문이다.
진 것을 버려야 하는 부담감,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 책임감 등에서 그것은 기인된다.
그리하여 문제를 회피하거나 답을 회피하는 행태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 없이, 완전에의 깨달음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의 완성을 꿈꾸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고서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무모함과 다를 바 없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의 완성은 차라리 찰나주의에 가깝다.
완전에의 깨달음이 바로 사랑에의 그것과 같고,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이 또한 그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하려 한다.
사랑과 우정 중 선택하려 하고, 아가페와 에로스 중 선택하려 한다.
더 큰 가치와 일상의 완성 중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틀렸다. 그것은 본래 하나인 것이다.
이것과 저것 중 선택하려는 것은 이분법에 의한 그릇된 자세이다.
그것은 선택하여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선택은 다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눌 때에 쓰이는 것이다.
조금 더 완전에 가까운 것과 조금 더 먼 것을 나눌 때에 유효한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에,
나아갈 길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에 한해 국한된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일이다.
가령, 정치적인 노선을 결정할 때에는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현실의 안위가 아닌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선택은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결혼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위한 기초공사가 되어야 한다.
직업은 선택으로써 가능한 일이지만
그 선택으로 하여 보다 더 큰 가치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그 선택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택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는 식은
허무에 대한 도피가 될 뿐이다.
생존하기에 급급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흡사 밤하늘의 별을 길잡이로 항해하는 선원의 그것처럼
우리는 완전에의 이상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현실에서의 주춧돌과 이상에의 설계도는 하나이다.
일상의 완성이라는 현실의 선택과 큰 가치라는 이상에의 그림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선택은 참된 이상이 전제 되어야 한다.
대부분 현대인의 꿈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생존을 넘어선 그 무엇이 없기에 그들의 오늘 하루는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온전한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실의 선택에 치여 내일을 잃고 이상을 잃고 결국 스스로를 잃은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고 있는가, 오늘 하루 무엇을 선택하였나,
또한 그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가, 골몰해 볼 일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깨달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는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여
의심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아 순수한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엄마이다.
엄마와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그처럼 천진난만한 것이다.
깨달은 이는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듯이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순수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처럼 독립적이어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보호받지 않고,
어리광부리지 않아 고독한 것이다.
어른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신이다.
신과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독립하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이처럼 홀로 고독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엄마와 대화하고
어른은 신과 대화한다.
진정한 어린이는 엄마와 완전히 통하고
진정한 어른은 신과 온전히 통한다.
깨달음은
비로소 온전한 아이와 온전한 어른이
하나 되는 것.
내 안의 아이와 어른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아이의 천진함과 어른의 고독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엄마의 완전성을 의심하지 않는 아이처럼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그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그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다.
신을 배재한 사랑은
엄마를 잃은 아이의 그것과 같다.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추석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아마도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반월이나 애벌레의 꿈은 언젠가는 실현될 자연스러운 것이다.
꿈이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을 빌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시공을 초월해 점차 그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깨달음은 개인이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이다.
당연히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개인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으며
세상에 깨달은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는 신과 다름 없을 것이다.
깨달은 이가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언뜻 불완전으로 오해 되기 쉬위나,
머물러 있는 완전이 완전이라면 완전한 신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보이는가? 저 하늘의 달이.
비워진 것은 채워지고 채워진 것은 다시 비워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어디선가는 미워하고, 어디선가는 사랑할 것이다.
무언가의 시작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신을 닮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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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가는 왜 글을 쓰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에!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명상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선은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쓰는 것이다.
그래서 쓰는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러나 사실 그 다음 문제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사실 존재의 근원에 절절히 매달려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사실을 말하자면 구원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보다는 일찍이 같은 문제로 생을 불살라 보았던,
천 사람의 왜곡된 동경보다 영혼이 통하는 단 한 사람과의 소통이 천만배는 더 즐겁다.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그들의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교인에게 그것이 배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알아야 한다. 삶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길은 신과의 대화 뿐이다.
나 아닌 타인의 모습에서도 제 안에서 발견했던 신의 모습을 똑같이 발견해 내야 한다.
사랑은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은 네가 나임을 깨달았을 때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타인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해 본다. 과연 깨닫기 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해 무지했을까?
실패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성공해 있었으므로.
영혼에 아로새겨진 사랑은 인간의 숙명이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단지 삶이 아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가장 큰 꿈을 꾸는 것.
한 순간 한 순간 이미 그 꿈이 되어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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