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실현
첼리스트가 있다. 혹은 기타리스트가 있다.
그들이 처음부터 학예회 반주 정도를 하려 했다면
몇 시간 혹은 몇 일 동안 음악 선생에게 배우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 한다면
그들에게 배우는 기술만으론 부족하다.
그것은 타인의 것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화가나 글쟁이도 마찬가지다.
그림의 기초가 되는 데생법이나 글짓기의 기초 되는 문법을 익힌다고 해서
진정한 화가나 글쟁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스스로 터득한 자기 것이 아니다.
실 경험에서 터득한 스스로의 음색, 스스로의 색채,
스스로의 그릇에서 나온 진짜가 아니라는 말이다.
무릇 연주란, 예술이란
오롯이 스스로가 자연의 완전성에서 끌어들인,
신에게서 자극 받은 필히 영감이어야 한다.
개체가 전체와 접속하는 떨림이 있다.
그 순간 자연은 그대로 인간에게 다가와 영감이 된다.
인간은 신에게 다가가 비로소 진짜가 된다. 실로 신의 순간이다.
그러나 영감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우연히 피어나는 느낌이어선 부족하다.
준비된 배우처럼, 액션! 한 마디에 자신이 아닌 바로 그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마땅히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순간 세계는 신의 시간에 지배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온전히 스스로 전체와 맞대면 하려면 남의 것을 흉내내는 것으로는 곤란하다.
자기 안의 그것을 끌어 내어야만 한다.
그것은 교과서나 책에는 없는 것이다.
타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단편적인 교훈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대가 연주자라면 그대 자신을 연주하여야 할 것이다.
화가라면 그대 자신을 그려야 할 것이며
작가라면 그대 자신을 써보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백프로 사용하는 것,
자기 안에 잠자고 있는 영감을 흔들어 깨우는 것,
자기 안의 완전성을 불러 오는 것이다.
각자에겐 각자에 맞는 빛깔과 모양이 있다.
스스로에게 알맞은,
스스로의 색채에 맞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스승에게 배운 기술로 진정한 예술가가 된 이를 보았는가?
모차르트가, 고흐가, 이중섭이
스승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보았는가?
명상가에게 투정하여 그것을 얻어내려 하지 마라.
위대한 이를 친구로 삼을 수 있되 그의 기술이 아닌,
그가 신과 만나는 모습 그것을 닮아야 할 것이다.
자기 안의 꿈을 실현 시키는 방법으로 말이다.
배움은 상대적인 시각이다.
배움이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