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의 대화

신과의 대화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0:56

신과의 대화
 
어느 날 신(神)이 지구를 방문하였다.
그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인간들이 신의 광장에 모였음은 물론이다.
신과 인간은 대화하였다.
그 중 어리석은 자는 “삶의 의미가 뭐예요?” 하며 신을 귀찮게 하였다고 한다.

신의 광장에 몰려나간 인간들은 저마다 질문을 하였다.
그동안 인간은 일방적으로 내팽겨진 듯한 삶을 살아 왔으니
일말의 보상심리가 있었던 것이다.

왜 그동안 인류를 방치해 놓았나요?
혹은 당신은 정말 전지전능한가요? 등의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신을 믿어 의심치 않아서 순진한 질문을 하는 인간,
그리고 여전히 신을 의식하면서도 스스로의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

아니, 그 상위에 또 나눌 수 있는 부류가 있다.
신에게 꼭 질문해 보고야 말겠다는 인간,
그리고 신에 대한 질문이 곧 스스로에 대한 질문임을 아는 인간.
역시 신에게 질문해 보겠다는 인간은 어쩌면 순진한 인간이다.

신에게 질문하겠다는 것은 곧 신과 스스로를 분리하여 상대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인간들이 하는 질문이란 신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역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내가 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신이라면 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또한 인간들과 어떤 대화를 하고 싶을 것인가?

바로 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다.
그것은 깨달은 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스스로의 삶 밖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
삶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삶 밖에서 발견해 내는 것.
마치 신이 그렇듯 세상을 운영해 보는 것!
 
인간의 시선으로는 신과 대화할 수 없다.
대화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신은 늘 인간을 방문하고 있다.
그를 알아채고 매 순간 신과 대면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신은 늘 인간을 방문하고 있고,
어리석은 인간이 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 영역을 그만큼 넓힐 수 있는가이다.
애초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것처럼 나는 무언가를 창조해 보았는가,
혹은 그처럼 고뇌해 보았는가?

바로 그것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는 신에게 질문할 것이 있는가?
그것은 그대의 평소 의혹인가, 불만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답을 합리화하기 위한 확인사살인가?
아니면 진실로 신과 대등하게 질문할 위치가 되었는가?
 
매 순간 신과의 대화에 게으르지 않았다면
신이 지구을 방문했다고 해서 따로 질문할 일 따위는 없다.
굳이 그 복잡한 신의 광장에 나가 신을 알현해야 할 이유도 없다.
매순간 신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소통이, 만남이 중요한 이유이다.
신과의 충분한 소통이, 완전한 만남이 가능하다면
질문 따위는 필요 없다. 단지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합일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내 창가를 두드릴 때,
신이 내 마음을 들여다 볼 때,
신이 내 발걸음을 인도할 때,
그때의 내 눈빛이 중요하다.

인간의 삶이 신의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신과 완전한 소통을 이루어냈는가,
그리하여 그것을 완전하게 재현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할 터이다.
내 사랑의 손짓이, 몸짓이,
그리고 온통 우주를 품을 수 있는 내 영혼이 중요할 터이다.
 
신을 눈으로 확인해야 대화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신과 대화할 수 없다.
그대는 고작 그대 스스로의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의 영혼은 신과 대화할 만큼 성숙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에 하나 신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바로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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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관계 맺는 것

존재는 관계 맺는 것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0:47
존재는 관계 맺는 것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얻은 이가 있었다. 처음에 그는 보석을 얻었다는 것, 그 이유 하나만으로 기뻤다. 그 기쁨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세상은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고 우주는 온통 그의 기쁨을 축복했다.


제아무리 값진 보석도 그의 것보다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갈 수 없었다. 보석을 알아보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랑할 수도 없었고 그 아름다움을 함께 칭송할 이도 없었다.


그는 점차 보석이 되어갔다. 마침내 스스로 빛을 낼 수밖에 없었다. 자랑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찬사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존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존재한다는 충분한 이유로 의미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보석은 존재하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가질까? 높은 성 맨 꼭대기에 홀로 빛나는 보석이 세상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다. 의미는 서로 관계 맺을 때에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관계 맺지 못한 존재는 이미  그 존재의미가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 관계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보석을 알아보는 이가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오늘 이 순간을 완성하지 못하면 이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내 존재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결국 내 존재는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삶이 짐승의 그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완성해야 한다. 스스로를 완성하여 관계를 증명해야 한다. 단지 보석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으로는 관계가 될 수 없다. 단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는 관계가 완성될 수 없다.


신(神)이 애초에 그랬다. 스스로 완전함에 머물지 않고 인간을 재현했다. 또한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이 순간을 완성하고 있다. 그 완전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을 인정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제패한 뒤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화두이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세계를 아울렀다면, 혹은 우주를 꿰뚫었다면 그것만으로 삶은 충분히 빛나는 것일까.

 

아니다! 마치 신의 그것과 같아야 하리라. 그처럼 창조하고 그처럼 만나야 하리라. 끊임없이 재현하고 매 순간 소통을 시도해야 하리라. 마침내 그도 신처럼 누군가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기꺼이 그 계획에 동참할 것이다.


마침내 신의 완전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삶이다.-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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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사랑 2

완전한 사랑 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0:39

완전한 사랑 2

 

만약 이 세상에 태어난 단 한 사람, 최초의 인간이 있다면?

신이 최초로 재현한 인간, 그가 아담이든 이브이든 또 바로 당신이든

그 사람은 매 순간 신(神)과 맞대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과 꼭 닮은 그를 뉘라서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할 것인가?

지금, 60억명의 인간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본질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본래 이 우주의 주인으로 태어났다.

신이 그렇게 창조했다.

자신과 꼭 닮게 재현한 것이다.-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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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사랑

완전한 사랑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0:35

완전한 사랑

 

최초에 신이 있었다. 완전한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이를 일러 <재현>이라고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사랑>에 의해서이며, 이로 인해 신과 인간은 <만남>을 이루었다. 이것을 <신의 완전성>이라고 한다. <완전>이란 창조를 통해 <또 다른 자신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에 의한 <만남>의 <재현>이 인간의 피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문에 여전히 완전을 욕망하고 있다. 예의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신의 언어인 <진리>를 체득해야 한다. 인간이 그동안 잊고 있던  이 최초의 역사를 알아 챈다고 해서 이를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즉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신과 <완전한 소통>을 해야하고 인간이 깨달은 <진리>가 그 수단이 된다.


신과 대화하여 완전한 소통을 이루면 애초 <신의 완전성을 재현>한 셈이 된다. 신이 매 순간 시도하는 인간과의 소통에 인간이 답한 것이 된다. 신, 그 하나에서 시작된 역사가 마침내 다시 하나로 합일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불완전한 삶으로 우주를 떠돌던 인간은 비로소 삶의 궁극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완전한 사랑은 <재현>을 그 속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창조의 작업이 시작된다.


애초 신의 그것처럼 완전한 사랑은 <또 다른 자신을 창조>한다. 창조한다는 것은 마치 신처럼 <자기 자신을 재현>하는 것이다. 바로 <신과 꼭 닮은 또 다른 자신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은 다 같이 신의 완전성을 물려 받았으므로 그것이 가능하다.


완전은 완전을 낳기에, 가능하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과 완전한 사랑>으로 맺어질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만나는 이유이다. 완전한 사랑은 신이 그 매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로 만날 수 있다.


다시 하나로 돌아올 수 있다. 애초에 하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신과의 완전한 소통에 성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신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과의 <완전한 소통>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역사 이래 모든 사랑은 그 모두가 신과의 사랑을 위한 것이다. 기어이 그러지 못한다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우주의 미아로서 머물 뿐이다. 머물러 있는 것은 곧 죽음이다. 생명은 자연이 그렇듯이, 신이 그렇듯이 매순간 살아 움직여야 한다. <매 순간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신이 그렇듯 인간은 각자가 이 <우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비로소 (신과 같이 생각함으로써) 인간 삶의 비참은 극복되어지고 마침내 인간 삶이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불완전은 불완전을 낳는다. 인간은 엄마에 의해 태어난 이유가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된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단지 자식이 아니라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사랑이란

사랑이란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9:43
사랑이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그 나라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이다.

 

대화를 시도하고 소통을 이루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외국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신의 언어이다.
신과의 소통을 위하여 진리는 존재한다.  

진리로써 그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대화는 완전한 소통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것으로 사랑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은 언제라도 진리로써 인간과 소통하려 하며

 

그 시도는 물론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진리에의 선택은 다만 그 시작에 불과하다.

 

  

시작은 궁극을 예고하고 있지만

시작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궁극이 될 수 없다.

 

사랑이란,
진정한 사랑이란

 완전한 소통의 도구인 바 진리로서

신과 대화하고 그의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인간은 신의 사랑을 재현할 수 있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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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도 진화한다

이상도 진화한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9:38

이상도 진화한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처음에 물을 두려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씩 물 속에서 자유를 느끼기 시작한다. 물속에서 눈을 뜨는 것도 가능해지고 몸을 띄우기도, 편안히 눕기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마침내 두 손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게 되기까지 아이는 많은 발전을 거듭한다. 지상에서 걸어다니는 것 만큼 물 속에서도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무언가를 실행해 나아가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이상에의 그림이다. 그것은 집을 지을 때의 설계도와 같고 촬영할 때의 콘티와 같다. 각 단계에는 그에 맞는 콘티가 필요하다. 마인드를 바꾸는 것이다.

 

물론 이상에의 그림은 실제로 일의 효율에 영향을 미친다. 말하자면 수영을 잘 하기 위해서는 연습 외에도 보다 큰 그림의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에 뜨기를 원한다면 머리 속으로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볼 필요가 있다.


두 팔을 내저어 온전한 수영을 하고 싶다면 또한 바로 그 장면을 능숙하게 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 된다. 이제 갓 물 위에 뜰 줄 알게 된 사람에게 두 팔을 내젖고 허벅지를 힘차게 놀려 빠르게 수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상에의 그림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가능한 일이 된다.


강한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이 그 첫 번째 소득이요, 실제로 동작을 할 때 실질적 도움을 받는 것이 두 번째 소득이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느끼는 충만감은 실제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 그림 자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현실에서도 그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이는 삶에서 부딪히는 그 어떠한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렵지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할 때나, 멋지게 성공해 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 완전한 그림은 성공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


이상에의 그림은 실제 통증을 없애 주기도 하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도 하며 무엇보다 그 일을 성공할 수 있게 한다. 이상에의 그림 그리기에 성공한 인간은 삶에 대한 자세도 달라진다. 삶에 있어서 마음 바꿔 먹기란 어쩌면 죽기 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상에의 그림은 더더욱 절실한 일이다.


물론 그 그림은 각 단계에 따라 다르다. 빠르게 수영하기에 성공한 이에게는 보다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 현실이 진화함에 따라 이상도 따라 진화해야 마땅하다. 목표를 이루었다 하여 섣불리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인간은 그 향기를 잃고 이상은 그 빛을 잃고 만다. 이상도 진화한다.


수영하기에 성공했다면 기록을 단축한다거나 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따거나 하는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 한다. 세계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면 당연히 세계를 재패하는 이상을 가져야 할 일이다.


각자는 각자에 맞는 이상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 이상에는 완전한 그림이 길잡이가 된다는 것. 이상에의 그림은 그대에게 북극성이나 남십자성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대, 망망대해와도 같은 인생 길에서 잠시 길을 잃었는가? 혹은 그 무엇에도 사그러 들지 않을 자신감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그대 스스로가 그대의 길잡이가 되어라. 그대의 길잡이는 바로 그대 자신이 그린 이상에의 그림이다.

 

 

***

 

진리에의 이상은 처음부터 단계가 필요하진 않다. 자신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큰 이상을 가져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상에의 완전한 그림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러나 그 이상을 이루면 또 다른 이상을 가지게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이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아이가 처음부터 세계를 제패하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성공하게 되면 보다 더 큰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제패한 이가 또 다시 가져야 할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알맞는 또 다른 이상이다. 곧 만남이다. 자신의 현실과 이상을 온전히 나눌 친구를 만나야 한다. 비로소 가장 사랑하는 이를 온전하게 만날 수 있다. 그 만남은 서로의 가치를 더욱 가치있게 하는 일이다. 신이 그랬듯이 그도 그와 꼭 닮은 이를 재현해야 한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세상과의 말 걸기에 성공해야 한다

세상과의 말 걸기에 성공해야 한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9:35
세상과의 말 걸기에 성공해야 한다

인간이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나 명예를 추구하고 권력을 탐하는 것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성공을 욕망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랑하기 위해서이며 사랑받기 위해서이다. 누구에게? 가족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에!

결국 스스로가 가족을, 사랑하는 이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을 걸고 싶은 것이고 대화하고 싶은 것이다. 세계와의 대화는 인간에게 내재된 사랑에의 욕망이다.

물론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은 그 어느 순간에도 소통을 원하며 조금이라도 더 완전에 가깝기를 원한다. 그 방법이 어떤 이에게는 돈을 버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명성을 얻는 것이다. 비로소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은 발언권을 얻는 것으로 '성공'을 완성했다고 생각해버린다. 혹은 그 발언권으로 낮은 차원의 소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성공'은 발언권을 얻은 것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며 보다 큰 소통을 어루어 내는 것이다.
 
발언권을 얻고 자신의 의사를 일관성을 가지고 드러내는 것으로 소통에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완전한 소통이라는 명분이 없다면 일관성을 가질 수 없다. 돈이나 명성을 얻는 방법은 그래서 차원이 낮은 소통밖에 이룰 수 없다.
 
명상가는 성공해야 한다

명상가는 소통을 원한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내는 일련의 방법으로 세계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는 세계에 발언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완전한 소통에 보다 더 가까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 지라도, 설사 그의 사후일지라도 그 방법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후세의 인간들과도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랑의 순간은 시공을 초월해 유효하다.

고흐는 완전한 사랑에 성공하고 있다

고흐는 끝내 전시회 한 번 못하고 죽었지만 세상과의 소통은 이루어진 셈이다. 그는 후세의 인간들과 그의 그림으로 소통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의 그림은 기어코 진정한 그림이 되는 것이다.

고흐의 완전한 사랑은 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혼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의 그림과 후세의 인간이 떨리는 마음으로 대면하는 순간 재현되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매 순간 재현될 수 있다.

'우리의 만남'은 신의 계획이다

만남의 신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일찍이 완전한 사랑을 꿈꾸었던 인간들이 깃발을 높이 들고 그 웅대한 발걸음을 지금 시작한 것이다. 그 이상은 완전한 사랑이며 그것에 다다르는 방법은 '우리 만남'의 진화이다.

사실은 매 순간 완전한 사랑을 재현하고 있다. 애초 신의 계획이 완전한 사랑이었으며 그것을 우리는 매 순간 재현하고 있으며 또한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이 시도가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는 보다 더 크게, 끊임없이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후세에도, 그 이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소통의 방법으로 완전한 사랑을 재현할 수 있다. 그것만이 오늘 하루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이다.

성공은 이미 시작되었다

성공이란 처음에 이상에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다음, 한 순간도 그 꿈에의 끈을 놓지 않고 일관성을 가짐으로서 완성이 시작된다. 그 이상에의 그림 속에 녹아들어 그 꿈과 하나됨으로서 실은 꿈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꿈은 바로 신에의 그것이기 때문이며 신은 이미 그 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성이란 이름으로 신은 그것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신의 계획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가 곧 의미이다

역사는 어차피 진화하지만 그 역사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역시 의미는 없다. 참여만이 역사와 하나되는 방법이며 비록 벽돌 한 장일지라도 역사의 성을 쌓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의미는 완성된다. 역사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경꾼이 되어서는 어떻게든 허무를 극복할 수 없다.

'우리의 만남' 역시 역사의 한 장(場)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강물에 발을 담그는 방법으로 우리는 허무를 극복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실질적인 성공이나 실패는 중요하지 않다. 참여함으로서 이미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 오늘 하루도 성공하고 있는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만남은 신의 재현처럼

만남은 신의 재현처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9:02

만남은 신의 재현처럼

 

만남은 평등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만남은

존재의 존엄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 된다.


가족과의 만남이,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궁극이 될 수 없는 것은

특유의 의존성 때문이다.

 

만남이 더 큰 가치가 되지 못하고

상대적 의미로 퇴색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신과 대등한 존재로서 온전히 그와 소통하는 것이다.


당연히 신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만남도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만남이어야 한다.


그동안 중력에 지배 받던 만남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또 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수직이 아닌 수평적 만남,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온전히 일치하는 만남.


거기에 궁극이 숨쉬고 있다.

완전한 사랑이, 완전한 자유가 빛나고 있다.


홀로 가는 길이다.

온전히 홀로 가는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이다.

 

가다가, 홀로 가다가 어느 순간 완전하게 만나는 것이다.

그 순간 완전한 사랑을 재현할 수 있다.

 

***

 

깨달은 이가 글을 쓰는 것 역시

만나기 위해서이다.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소통하기 위함이며


혼자만의 독백이 아닌

메아리로서의 떨림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신과 꼭 닮은 자유(인)와 만나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며


그럼으로 온 우주에

신의 완전성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애초 신의 재현을

다시 펼쳐 보이기 위함이다.-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참된 만남

참된 만남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8:37

참된 만남


깨달음은 개인에게 최초의 자유를 준다.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소통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자유인과 만날 수 없다면?

그예 신과 만날 수 없다.


신과 만날 수 없다면 우리는 부자유한 인간에 머무르고 만다.

그 자유는 곧 단절이 된다.

혼자만의 노래가 된다.

독백이 된다.


그러므로 만나야 한다.

신과 꼭 닮은 자유와 만나야 한다.

노래는 울림이 되고 울림은 메아리가 되고 메아리는 떨림이 되어야 한다.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림도 그림이 될 수 없고

연주도 연주가 될 수 없다.


그림이 진정한 그림이 되고

연주가 진정한 연주가 되듯이

우리는 신과 만나야 한다.

신과 꼭 닮은 자유와도 만나야 한다.


그 순간 신은 미소 짓는다.

함께 노래하며 함께 춤춘다.

비로소 삶의 궁극이 될 수 있다.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


그 순간을 노래하고 싶다.

완전한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8:34

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완전한 사랑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만남을 담보로 한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듯이 그것은 두 세계가 온전히 소통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왜 만남이어야 하는가?

사랑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두 세계를 연결하여 공명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하나 되기 때문이다.


그 떨림이 우리의 세포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만남의 순간이 우리의 욕망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최초에 완전한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신은 인간을 재현했다.

그러므로 모든 완전은 신과 인간의 만남처럼 완전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완전한 신도 인간을 재현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있다.

만나지 못한 자유는 그런 까닭에 완전할 수 없다.

어느 순간 그 자유는 일정한 영역 안에 갇히고 만다.

필시 만남을 꿈꿀 수 밖에 없다.


소통되지 못한 개인의 자유는 만남으로 인해 소통을 이루고

그 소통은 곧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온전하게 만났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비로소 삶의 궁극과 만날 수 있다.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자유가 수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은 까닭이다.

신은 우주와 완전한 사랑을 한다.

매 순간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시도한다.

완전한 소통을 시도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그 어떤 만남의 순간에도 우리도 마치 신처럼 완전을 욕망하다.


신의 완전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신의 완전성을 내 몸에서 재현하는 것이 건강이요,

내 정신에서 재현하는 것이 자유라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이 사랑이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완전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완전한 자유는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기에 깨달음이 전제된다.

깨달음이 바로 시작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8:10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주춧돌 없는 기둥이나 서까래는 있을 수 없다.
기초 공사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설계도 없는 집도 있을 수 없는 법.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허무하다.
아등바등 살아 보지만 기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 허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다 큰 이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 간다고 자부하는 생활인의 실패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두려움 때문이다.
진 것을 버려야 하는 부담감,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 책임감 등에서 그것은 기인된다.
그리하여 문제를 회피하거나 답을 회피하는 행태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 없이, 완전에의 깨달음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의 완성을 꿈꾸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고서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무모함과 다를 바 없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의 완성은 차라리 찰나주의에 가깝다.


완전에의 깨달음이 바로 사랑에의 그것과 같고,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이 또한 그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하려 한다.
사랑과 우정 중 선택하려 하고, 아가페와 에로스 중 선택하려 한다.
더 큰 가치와 일상의 완성 중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틀렸다. 그것은 본래 하나인 것이다.
이것과 저것 중 선택하려는 것은 이분법에 의한 그릇된 자세이다.


그것은 선택하여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선택은 다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눌 때에 쓰이는 것이다.
조금 더 완전에 가까운 것과 조금 더 먼 것을 나눌 때에 유효한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에,
나아갈 길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에 한해 국한된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일이다.


가령, 정치적인 노선을 결정할 때에는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현실의 안위가 아닌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선택은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결혼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위한 기초공사가 되어야 한다.
직업은 선택으로써 가능한 일이지만
그 선택으로 하여 보다 더 큰 가치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그 선택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택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는 식은
허무에 대한 도피가 될 뿐이다.
생존하기에 급급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흡사 밤하늘의 별을 길잡이로 항해하는 선원의 그것처럼
우리는 완전에의 이상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현실에서의 주춧돌과 이상에의 설계도는 하나이다.
일상의 완성이라는 현실의 선택과 큰 가치라는 이상에의 그림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선택은 참된 이상이 전제 되어야 한다.


대부분 현대인의 꿈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생존을 넘어선 그 무엇이 없기에 그들의 오늘 하루는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온전한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실의 선택에 치여 내일을 잃고 이상을 잃고 결국 스스로를 잃은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고 있는가, 오늘 하루 무엇을 선택하였나,
또한 그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가, 골몰해 볼 일이다.

Posted by 신비(妙)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57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깨달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는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여

의심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아
순수한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엄마이다.

엄마와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그처럼 천진난만한 것이다.

 

깨달은 이는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듯이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순수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처럼 독립적이어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보호받지 않고,
어리광부리지 않아
고독한 것이다.


어른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신이다.

신과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독립하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이처럼 홀로 고독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엄마와 대화하고

어른은 신과 대화한다.


진정한 어린이는 엄마와 완전히 통하고
진정한 어른은 신과 온전히 통한다.


깨달음은

비로소 온전한 아이와 온전한 어른이

하나 되는 것.

내 안의 아이와 어른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아이의 천진함과 어른의 고독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엄마의 완전성을 의심하지 않는 아이처럼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그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그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다.


신을 배재한 사랑은

엄마를 잃은 아이의 그것과 같다.


Posted by 신비(妙)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45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추석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바람은 점점 서늘해지고 반월은 점차로 온전한 보름달이 되어 가고 있다.
아마도 내 친구들의 눈빛 또한 저 달빛과 함께 더욱 깊어질 것이다.


아마도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되려는 반월처럼, 나비가 되려는 애벌레처럼
언젠가는 그 꿈이 실현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반월이나 애벌레의 꿈은 언젠가는 실현될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고
신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이다.


꿈이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았음을, 이미 이루어 놓았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신의 완전성을 빌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소극적 의미에서의 재현이 개인의 자유라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재현이 전 인류에의 소통이다.


시공을 초월해 점차 그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어차피 ‘인류에의 소통’은 ‘개인의 자유’의 연장선 상에 있지만,
사랑이라는 그 속성으로 인해 소통이라는 방법으로 자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개인이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소통할 수 없을 때에 곧 일정한 영역 안에 갇히게 된다.
갇힌 자유라면 자유가 아니다.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당연히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개인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으며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감으로써 시공을 초월해 전 인류를 아우르는 것이다.


세상에 깨달은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는 신과 다름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도 신처럼 자기 자신과 꼭 닮은 생명을 창조해 낼 것이다.
진리로 소통할 수 있는 그의 자식(?)을 낳을 것이다.


깨달은 이가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신처럼 그들은 창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의 완전성이 바로 끊임 없는 창조이기 때문이고,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언뜻 불완전으로 오해 되기 쉬위나,
사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완전이다.
머물러 있는 완전이라면 이미 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물러 있는 완전이 완전이라면 완전한 신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세계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신은 또 다른 우주를 설계하러 떠났을 테니까.


보이는가? 저 하늘의 달이.
조금은 이지러진, 완전을 꿈꾸는 둥그런 달이.
저 달은 곧 채워질 것이고 완전한 보름달이 될 것이다.
보름달은 다시 반달로, 반달은
다시 초승달로 비워질 것이다.


비워진 것은 채워지고 채워진 것은 다시 비워질 것이다.
그것이 완전이다.
완전한 나비가 다시 알을 낳듯이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그것이 신의 완전성이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어디선가는 미워하고, 어디선가는 사랑할 것이다.
미워하는 그것도 결국은 사랑의 한 부분이듯이,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그 모든 것도 사실은 나아가는 것이다.


무언가의 시작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신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머물러 있지 않고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닮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사실 순간 순간 신이 우리를 방문하기 때문이다.
느끼는가? 신이 지금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있음을.



-신비(妙)  2004. 추석즈음


Posted by 신비(妙)

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23



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명상가는 왜 글을 쓰는가?
그들의 글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서인가?
그들의 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진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기에 명상가가 존재한다고.


그러나 천만에!
명상가는 누군가 들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명상가가 쓰는 글은 상대를 전제 하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살아 있음의 징표이며 나아감의 의식이다.
그것은 흡사 혈액순환이다. 숨쉬는 것이고 박동하는 것이다!


명상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런 영향력이 있다.
허나 그것은 그들의 사랑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뿐이다.


우선은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쓰는 것이다.
제 안에 넘쳐나는 진리의 물을 길어 내는 것,
매 순간 신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길가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의식을 어쩌겠는가?
어느 새 빛처럼 새어 나와 감출 수 없는 그것을,
폭포수처럼 터져 나와 감당할 수 없는 그것을.


그래서 쓰는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사랑이 전달된다면 주위는 조금 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다음 문제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부분만을 받아 들였든, 왜곡하여 받아 들였든
그것은 쓴 사람과는 별 개의 문제다.


사실 존재의 근원에 절절히 매달려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그 진리를 온전히 소화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의 글은 왜곡되어 전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구원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말하는 것은 그리 탐탁한 일이 아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보다는 일찍이 같은 문제로 생을 불살라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소통이 훨씬 좋다.
단 한 사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가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치보다 크다.


천 사람의 왜곡된 동경보다 영혼이 통하는 단 한 사람과의 소통이 천만배는 더 즐겁다.
그럼에도 왜 쓰는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펄펄 살아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그들의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이상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이나 애정 문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되지 않는다.


종교인에게 그것이 배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이 사는 힘은 가족도, 친구도 아니며 결혼도, 사회적인 성공도 아니다.
매순간 신과의 대화, 오로지 그것 하나이다.


알아야 한다. 삶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길은 신과의 대화 뿐이다.
어떠한 글을 읽든, 대화를 하든 사랑을 하든 그 상대는 신이 되어야 한다.
먼저 제 안에서 신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 아닌 타인의 모습에서도 제 안에서 발견했던 신의 모습을 똑같이 발견해 내야 한다.
그때에야 너와 내가 비로소 같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야 너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비로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은 네가 나임을 깨달았을 때부터 시작된다.
네가 다름 아닌 바로 나임을 알았을 때
그때 비로소 가슴 속에서 울음 같은, 웃음 같은 사랑이 뭉클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로 가슴 먹먹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그렇게도 삶이 고단했던 것인데 네가 바로 나라니!
이 소식은 세상 천지가 온통 뒤바뀌고도 남을 만한 충격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생각해 본다. 과연 깨닫기 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해 무지했을까?
네가 나임을 모르고 사랑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때에도 네가 나인 것처럼 사랑했었고,
깨달은 것처럼 살아오고 있었다.


실패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성공해 있었으므로.
깨달음을 갈구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있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깨닫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다.-
말보다는, 글보다는 영혼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에 아로새겨진 사랑은 인간의 숙명이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선언은 한참 뒤에나 일어난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전히 심장은 뛰어야 했고 피는 돌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단지 삶이 아니다.
깨닫기 전에 가장 큰 꿈을 꾸었던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또한 가장 큰 꿈을 꾸게 된다.
물론 전 인류를, 우주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것이 명상가가 사는 방법이다.


언제 어느 때라도 가장 큰 꿈을 꾸는 것.
그렇다. 길을 나선 이상 개척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설사 죽고 난 뒤라 할지라도 이루어질 것을 안다.
깨닫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가운데 있음을 안다.


한 순간 한 순간 이미 그 꿈이 되어 있음을 안다.
그 꿈을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그 꿈 자체가 되어감을 안다.
그것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며, 곧 신이 이미 이루어 놓았음을 아는 것이다.
가장 큰 사랑임을 아는 것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사랑, 그 한마디를 위하여

사랑, 그 한마디를 위하여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17:06


 사랑, 그 한마디를 위하여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안의 ‘사랑’을 온전히
확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의 매력이나 사랑스러움과 관계없이,

온전히 스스로의 내부에서 완성되어야 할 사랑.
그를 정면으로 인식하기란 차라리
두려운 일이 되겠다.


 

어쩌면 그대는 그 한마디를 여지껏 아껴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실은 외면해 왔을
것이다.
그 말을 뱉어내는 순간, 그대는 그 사랑에 온전한 책임자가 될 것이므로.

물론 자기 안의 사랑인식 없이, 아무런 염려없이 사랑을 남발하던 이는
지금
이 순간 모두 잠들어 있을 것이므로 논외!

 


그대가 혈기방장했을 때 사랑이 있네 없네 하며
툭하면 그대의 친구들과 설전을
벌인 일을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아니라면 그대만의 세계에서 혼자만의 의례를 치뤘을지도,

아무려나.
그 사랑 타령은 이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상대의, 상대에 의한, 상대를 위한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당연히 아가페와 에로스, 어느 것이 진짜
사랑인가 하는 것도 폐기 되어 마땅한 질문이다.

진리가 그렇듯 사랑은 오로지 그대 스스로의 내부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것.
그대
스스로를 연주하여 신의 백프로를 복원해 내는 것.
그리하여 비로소
완성된 사랑은 실로 멋들어진 한 마당 굿판을 연출할 것이다.
그것은 자유자재 회롱이
될 수도, 기다림의 미학이 될 수도 있다.


 

구원은 있다! 이 한마디는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그 한마디를 위해 말을
아낄 수도 있어야 한다.
비록 그것 하나만을 위해 온 생을 내달린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이 한마디를 할 수 있게 된 날의 떨림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 순간 생은 오로지 절대의 빛으
로 빛났었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버린 것이다,
마침내  생과 그에 얽힌 사연 사연들은 철없는
아이를,
부단히도 사회를 배척하기만 하던  아이를,
덜컥 그 언덕에 가 닿게 만들어 버린지도 모른다.

인간이 꿀 수 있는 가장 큰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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