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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에 해당되는 글 38건
- 2008.12.10 신과의 대화
- 2008.12.10 존재는 관계 맺는 것
- 2008.12.10 완전한 사랑 2
- 2008.12.10 완전한 사랑
- 2008.12.10 사랑이란
- 2008.12.10 이상도 진화한다
- 2008.12.10 세상과의 말 걸기에 성공해야 한다
- 2008.12.10 만남은 신의 재현처럼
- 2008.12.10 참된 만남
- 2008.12.10 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 2008.12.10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 2008.12.10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 2008.12.10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 2008.12.10 명상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 2008.12.10 사랑, 그 한마디를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얻은 이가 있었다. 처음에 그는 보석을 얻었다는 것, 그 이유 하나만으로 기뻤다. 그 기쁨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세상은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고 우주는 온통 그의 기쁨을 축복했다.
제아무리 값진 보석도 그의 것보다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갈 수 없었다. 보석을 알아보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랑할 수도 없었고 그 아름다움을 함께 칭송할 이도 없었다.
그는 점차 보석이 되어갔다. 마침내 스스로 빛을 낼 수밖에 없었다. 자랑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찬사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존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존재한다는 충분한 이유로 의미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보석은 존재하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가질까? 높은 성 맨 꼭대기에 홀로 빛나는 보석이 세상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다. 의미는 서로 관계 맺을 때에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관계 맺지 못한 존재는 이미 그 존재의미가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 관계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보석을 알아보는 이가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오늘 이 순간을 완성하지 못하면 이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내 존재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결국 내 존재는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삶이 짐승의 그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완성해야 한다. 스스로를 완성하여 관계를 증명해야 한다. 단지 보석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으로는 관계가 될 수 없다. 단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는 관계가 완성될 수 없다.
신(神)이 애초에 그랬다. 스스로 완전함에 머물지 않고 인간을 재현했다. 또한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이 순간을 완성하고 있다. 그 완전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을 인정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제패한 뒤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화두이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세계를 아울렀다면, 혹은 우주를 꿰뚫었다면 그것만으로 삶은 충분히 빛나는 것일까.
아니다! 마치 신의 그것과 같아야 하리라. 그처럼 창조하고 그처럼 만나야 하리라. 끊임없이 재현하고 매 순간 소통을 시도해야 하리라. 마침내 그도 신처럼 누군가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기꺼이 그 계획에 동참할 것이다.
마침내 신의 완전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삶이다.-신비(妙)
완전한 사랑 2
만약 이 세상에 태어난 단 한 사람, 최초의 인간이 있다면?
신이 최초로 재현한 인간, 그가 아담이든 이브이든 또 바로 당신이든
그 사람은 매 순간 신(神)과 맞대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과 꼭 닮은 그를 뉘라서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할 것인가?
지금, 60억명의 인간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본질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본래 이 우주의 주인으로 태어났다.
신이 그렇게 창조했다.
자신과 꼭 닮게 재현한 것이다.-신비(妙)
완전한 사랑
최초에 신이 있었다. 완전한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이를 일러 <재현>이라고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사랑>에 의해서이며, 이로 인해 신과 인간은 <만남>을 이루었다. 이것을 <신의 완전성>이라고 한다. <완전>이란 창조를 통해 <또 다른 자신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에 의한 <만남>의 <재현>이 인간의 피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문에 여전히 완전을 욕망하고 있다. 예의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신의 언어인 <진리>를 체득해야 한다. 인간이 그동안 잊고 있던 이 최초의 역사를 알아 챈다고 해서 이를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즉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신과 <완전한 소통>을 해야하고 인간이 깨달은 <진리>가 그 수단이 된다.
신과 대화하여 완전한 소통을 이루면 애초 <신의 완전성을 재현>한 셈이 된다. 신이 매 순간 시도하는 인간과의 소통에 인간이 답한 것이 된다. 신, 그 하나에서 시작된 역사가 마침내 다시 하나로 합일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불완전한 삶으로 우주를 떠돌던 인간은 비로소 삶의 궁극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완전한 사랑은 <재현>을 그 속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창조의 작업이 시작된다.
애초 신의 그것처럼 완전한 사랑은 <또 다른 자신을 창조>한다. 창조한다는 것은 마치 신처럼 <자기 자신을 재현>하는 것이다. 바로 <신과 꼭 닮은 또 다른 자신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은 다 같이 신의 완전성을 물려 받았으므로 그것이 가능하다.
완전은 완전을 낳기에, 가능하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과 완전한 사랑>으로 맺어질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만나는 이유이다. 완전한 사랑은 신이 그 매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로 만날 수 있다.
다시 하나로 돌아올 수 있다. 애초에 하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신과의 완전한 소통에 성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신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과의 <완전한 소통>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역사 이래 모든 사랑은 그 모두가 신과의 사랑을 위한 것이다. 기어이 그러지 못한다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우주의 미아로서 머물 뿐이다. 머물러 있는 것은 곧 죽음이다. 생명은 자연이 그렇듯이, 신이 그렇듯이 매순간 살아 움직여야 한다. <매 순간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신이 그렇듯 인간은 각자가 이 <우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비로소 (신과 같이 생각함으로써) 인간 삶의 비참은 극복되어지고 마침내 인간 삶이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불완전은 불완전을 낳는다. 인간은 엄마에 의해 태어난 이유가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된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단지 자식이 아니라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비(妙)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그 나라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이다.
대화를 시도하고 소통을 이루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외국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신의 언어이다.
신과의 소통을 위하여 진리는 존재한다.
진리로써 그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대화는 완전한 소통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것으로 사랑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은 언제라도 진리로써 인간과 소통하려 하며
그 시도는 물론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진리에의 선택은 다만 그 시작에 불과하다.
시작은 궁극을 예고하고 있지만
시작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궁극이 될 수 없다.
사랑이란,
진정한 사랑이란
완전한 소통의 도구인 바 진리로서
신과 대화하고 그의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인간은 신의 사랑을 재현할 수 있다.
-신비(妙)
이상도 진화한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처음에 물을 두려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씩 물 속에서 자유를 느끼기 시작한다. 물속에서 눈을 뜨는 것도 가능해지고 몸을 띄우기도, 편안히 눕기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마침내 두 손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게 되기까지 아이는 많은 발전을 거듭한다. 지상에서 걸어다니는 것 만큼 물 속에서도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무언가를 실행해 나아가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이상에의 그림이다. 그것은 집을 지을 때의 설계도와 같고 촬영할 때의 콘티와 같다. 각 단계에는 그에 맞는 콘티가 필요하다. 마인드를 바꾸는 것이다.
물론 이상에의 그림은 실제로 일의 효율에 영향을 미친다. 말하자면 수영을 잘 하기 위해서는 연습 외에도 보다 큰 그림의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에 뜨기를 원한다면 머리 속으로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볼 필요가 있다.
두 팔을 내저어 온전한 수영을 하고 싶다면 또한 바로 그 장면을 능숙하게 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 된다. 이제 갓 물 위에 뜰 줄 알게 된 사람에게 두 팔을 내젖고 허벅지를 힘차게 놀려 빠르게 수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상에의 그림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가능한 일이 된다.
강한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이 그 첫 번째 소득이요, 실제로 동작을 할 때 실질적 도움을 받는 것이 두 번째 소득이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느끼는 충만감은 실제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 그림 자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현실에서도 그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이는 삶에서 부딪히는 그 어떠한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렵지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할 때나, 멋지게 성공해 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 완전한 그림은 성공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
이상에의 그림은 실제 통증을 없애 주기도 하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도 하며 무엇보다 그 일을 성공할 수 있게 한다. 이상에의 그림 그리기에 성공한 인간은 삶에 대한 자세도 달라진다. 삶에 있어서 마음 바꿔 먹기란 어쩌면 죽기 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상에의 그림은 더더욱 절실한 일이다.
물론 그 그림은 각 단계에 따라 다르다. 빠르게 수영하기에 성공한 이에게는 보다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 현실이 진화함에 따라 이상도 따라 진화해야 마땅하다. 목표를 이루었다 하여 섣불리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인간은 그 향기를 잃고 이상은 그 빛을 잃고 만다. 이상도 진화한다.
수영하기에 성공했다면 기록을 단축한다거나 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따거나 하는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 한다. 세계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면 당연히 세계를 재패하는 이상을 가져야 할 일이다.
각자는 각자에 맞는 이상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 이상에는 완전한 그림이 길잡이가 된다는 것. 이상에의 그림은 그대에게 북극성이나 남십자성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대, 망망대해와도 같은 인생 길에서 잠시 길을 잃었는가? 혹은 그 무엇에도 사그러 들지 않을 자신감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그대 스스로가 그대의 길잡이가 되어라. 그대의 길잡이는 바로 그대 자신이 그린 이상에의 그림이다.
***
진리에의 이상은 처음부터 단계가 필요하진 않다. 자신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큰 이상을 가져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상에의 완전한 그림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이루면 또 다른 이상을 가지게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이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아이가 처음부터 세계를 제패하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성공하게 되면 보다 더 큰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제패한 이가 또 다시 가져야 할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알맞는 또 다른 이상이다. 곧 만남이다. 자신의 현실과 이상을 온전히 나눌 친구를 만나야 한다. 비로소 가장 사랑하는 이를 온전하게 만날 수 있다. 그 만남은 서로의 가치를 더욱 가치있게 하는 일이다. 신이 그랬듯이 그도 그와 꼭 닮은 이를 재현해야 한다. |
만남은 신의 재현처럼
만남은 평등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만남은
존재의 존엄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 된다.
가족과의 만남이,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궁극이 될 수 없는 것은
특유의 의존성 때문이다.
만남이 더 큰 가치가 되지 못하고
상대적 의미로 퇴색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신과 대등한 존재로서 온전히 그와 소통하는 것이다.
당연히 신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만남도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만남이어야 한다.
그동안 중력에 지배 받던 만남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또 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수직이 아닌 수평적 만남,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온전히 일치하는 만남.
거기에 궁극이 숨쉬고 있다.
완전한 사랑이, 완전한 자유가 빛나고 있다.
홀로 가는 길이다.
온전히 홀로 가는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이다.
가다가, 홀로 가다가 어느 순간 완전하게 만나는 것이다.
그 순간 완전한 사랑을 재현할 수 있다.
***
깨달은 이가 글을 쓰는 것 역시
만나기 위해서이다.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소통하기 위함이며
혼자만의 독백이 아닌
메아리로서의 떨림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신과 꼭 닮은 자유(인)와 만나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며
그럼으로 온 우주에
신의 완전성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애초 신의 재현을
다시 펼쳐 보이기 위함이다.-신비(妙)
참된 만남
깨달음은 개인에게 최초의 자유를 준다.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소통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자유인과 만날 수 없다면?
그예 신과 만날 수 없다.
신과 만날 수 없다면 우리는 부자유한 인간에 머무르고 만다.
그 자유는 곧 단절이 된다.
혼자만의 노래가 된다.
독백이 된다.
그러므로 만나야 한다.
신과 꼭 닮은 자유와 만나야 한다.
노래는 울림이 되고 울림은 메아리가 되고 메아리는 떨림이 되어야 한다.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림도 그림이 될 수 없고
연주도 연주가 될 수 없다.
그림이 진정한 그림이 되고
연주가 진정한 연주가 되듯이
우리는 신과 만나야 한다.
신과 꼭 닮은 자유와도 만나야 한다.
그 순간 신은 미소 짓는다.
함께 노래하며 함께 춤춘다.
비로소 삶의 궁극이 될 수 있다.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
그 순간을 노래하고 싶다.
완전한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신비(妙)
최초에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완전한 사랑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만남을 담보로 한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듯이 그것은 두 세계가 온전히 소통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왜 만남이어야 하는가? 사랑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두 세계를 연결하여 공명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하나 되기 때문이다.
그 떨림이 우리의 세포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만남의 순간이 우리의 욕망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최초에 완전한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신은 인간을 재현했다. 그러므로 모든 완전은 신과 인간의 만남처럼 완전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완전한 신도 인간을 재현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있다. 만나지 못한 자유는 그런 까닭에 완전할 수 없다. 어느 순간 그 자유는 일정한 영역 안에 갇히고 만다. 필시 만남을 꿈꿀 수 밖에 없다.
소통되지 못한 개인의 자유는 만남으로 인해 소통을 이루고 그 소통은 곧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온전하게 만났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비로소 삶의 궁극과 만날 수 있다.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자유가 수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다.
신이 미리 마련해 놓은 까닭이다. 신은 우주와 완전한 사랑을 한다. 매 순간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시도한다. 완전한 소통을 시도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그 어떤 만남의 순간에도 우리도 마치 신처럼 완전을 욕망하다.
신의 완전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신의 완전성을 내 몸에서 재현하는 것이 건강이요, 내 정신에서 재현하는 것이 자유라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이 사랑이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완전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완전한 자유는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기에 깨달음이 전제된다. 깨달음이 바로 시작이다. |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주춧돌 없는 기둥이나 서까래는 있을 수 없다.
기초 공사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설계도 없는 집도 있을 수 없는 법.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허무하다.
아등바등 살아 보지만 기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 허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다 큰 이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 간다고 자부하는 생활인의 실패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두려움 때문이다.
진 것을 버려야 하는 부담감,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 책임감 등에서 그것은 기인된다.
그리하여 문제를 회피하거나 답을 회피하는 행태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 없이, 완전에의 깨달음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의 완성을 꿈꾸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고서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무모함과 다를 바 없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의 완성은 차라리 찰나주의에 가깝다.
완전에의 깨달음이 바로 사랑에의 그것과 같고,
스스로를 완성하겠다는 이상이 또한 그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하려 한다.
사랑과 우정 중 선택하려 하고, 아가페와 에로스 중 선택하려 한다.
더 큰 가치와 일상의 완성 중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틀렸다. 그것은 본래 하나인 것이다.
이것과 저것 중 선택하려는 것은 이분법에 의한 그릇된 자세이다.
그것은 선택하여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선택은 다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눌 때에 쓰이는 것이다.
조금 더 완전에 가까운 것과 조금 더 먼 것을 나눌 때에 유효한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에,
나아갈 길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에 한해 국한된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일이다.
가령, 정치적인 노선을 결정할 때에는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현실의 안위가 아닌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선택은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결혼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위한 기초공사가 되어야 한다.
직업은 선택으로써 가능한 일이지만
그 선택으로 하여 보다 더 큰 가치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그 선택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택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는 식은
허무에 대한 도피가 될 뿐이다.
생존하기에 급급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흡사 밤하늘의 별을 길잡이로 항해하는 선원의 그것처럼
우리는 완전에의 이상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현실에서의 주춧돌과 이상에의 설계도는 하나이다.
일상의 완성이라는 현실의 선택과 큰 가치라는 이상에의 그림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선택은 참된 이상이 전제 되어야 한다.
대부분 현대인의 꿈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생존을 넘어선 그 무엇이 없기에 그들의 오늘 하루는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온전한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실의 선택에 치여 내일을 잃고 이상을 잃고 결국 스스로를 잃은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고 있는가, 오늘 하루 무엇을 선택하였나,
또한 그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가, 골몰해 볼 일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딜레마
깨달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는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여
의심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아 순수한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엄마이다.
엄마와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그처럼 천진난만한 것이다.
깨달은 이는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듯이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순수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처럼 독립적이어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보호받지 않고,
어리광부리지 않아 고독한 것이다.
어른에게 전부는 그와 하나인 신이다.
신과 하나되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독립하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서
이처럼 홀로 고독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엄마와 대화하고
어른은 신과 대화한다.
진정한 어린이는 엄마와 완전히 통하고
진정한 어른은 신과 온전히 통한다.
깨달음은
비로소 온전한 아이와 온전한 어른이
하나 되는 것.
내 안의 아이와 어른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아이의 천진함과 어른의 고독이 온전히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엄마의 완전성을 의심하지 않는 아이처럼
신의 완전성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그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그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다.
신을 배재한 사랑은
엄마를 잃은 아이의 그것과 같다.
신의 완전성 혹은 신의 사랑
추석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아마도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반월이나 애벌레의 꿈은 언젠가는 실현될 자연스러운 것이다.
꿈이란 신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을 빌어 내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시공을 초월해 점차 그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깨달음은 개인이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이다.
당연히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개인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으며
세상에 깨달은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는 신과 다름 없을 것이다.
깨달은 이가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불완전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언뜻 불완전으로 오해 되기 쉬위나,
머물러 있는 완전이 완전이라면 완전한 신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보이는가? 저 하늘의 달이.
비워진 것은 채워지고 채워진 것은 다시 비워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어디선가는 미워하고, 어디선가는 사랑할 것이다.
무언가의 시작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신을 닮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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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가는 왜 글을 쓰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에!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명상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선은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쓰는 것이다.
그래서 쓰는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러나 사실 그 다음 문제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사실 존재의 근원에 절절히 매달려 보았던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사실을 말하자면 구원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보다는 일찍이 같은 문제로 생을 불살라 보았던,
천 사람의 왜곡된 동경보다 영혼이 통하는 단 한 사람과의 소통이 천만배는 더 즐겁다.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그들의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교인에게 그것이 배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알아야 한다. 삶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길은 신과의 대화 뿐이다.
나 아닌 타인의 모습에서도 제 안에서 발견했던 신의 모습을 똑같이 발견해 내야 한다.
사랑은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은 네가 나임을 깨달았을 때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타인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해 본다. 과연 깨닫기 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해 무지했을까?
실패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성공해 있었으므로.
영혼에 아로새겨진 사랑은 인간의 숙명이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단지 삶이 아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가장 큰 꿈을 꾸는 것.
한 순간 한 순간 이미 그 꿈이 되어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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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한마디를 위하여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쉬울지 모른다.
어쩌면 그대는 그 한마디를 여지껏 아껴왔는지도 모른다.
진리가 그렇듯 사랑은 오로지 그대 스스로의 내부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것.
구원은 있다! 이 한마디는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