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 친구에게 한 말이다.
“내게 노벨상을 준다면, 나는 거절하겠어!”
친구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유를 묻는다.
비웃지 않는 건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웃지도 않고 또 말한다.
“이유가 있지!”
하여간 말하는 모양이 여간 단호한 게 아니다.
친구는 다그친다.
“왜? 왜? 아니 왜?”
그러나 나는 씩 웃기만 할 뿐,
끝내 친구가 만족할 만한 대답은 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성급한 독자라면 박장대소가 터질 터이다.
아니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올지도.
“누가 주기는 하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받을 수 있느냐가 아니다.
또한 거절하는가, 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웃기는 건 초짜 글쟁이 주제에,
농담도 아니고 이미 태연하게 노벨상을 접수했다는 거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렇다.
사회적 잣대나 현실의 위치는 관심 밖이다.
다만 스스로에 골몰할 뿐이다.
세상의 상대적 관점에 상관없이
절대의 극점에서 저 아래 세상을 둘러 볼 뿐이다.
또한 수시로 불가능과 가능, 꿈과 현실, 태초와 불멸을 넘나들 뿐이다.
선악은 없다.
존재하는 건 포지션이다.
어떠한 상황이 되면 어른은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서 칭찬을 한다.
그러나 만약 사탕을 받는 아이가 속이 멀쩡한 애늙은이라면
그 상황이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그의 아이시절도 그랬다.
어른들에게는 티낼 수 없었지만 그 아이는 늘 그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냥 말로 하시지?” 혹은
“대화로 합시다, 대화로!
민망한 칭찬은 이제 그만!”
속으로만 외칠 수 있었다.
물론 아이인 척 연기하는 짓은 되도록 하지 않았다.
때문에 오해는 늘 따라 다녔다.
물론 해명 따윈 필요 없었다.
하여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거!
저런 민망한 상황은 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처럼 깐느나 베니스에서 그랑프리를 받는 일은
매우 통쾌한 삶의 반전이다.
따라서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포지션이 있다는 거다.
다만, 친구의 궁금증에 “포지션의 문제지!”
라고 말했을 때 금방 알아들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니라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창발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공과 사가 있다.
우리는 각자 한낱 인간이거나 때로 장대한 인간이겠지만
함께 했을 때만이 거대한 빅뱅이 일어난다.
서로 교감하고 영감을 주고받았을 때
비로소 우주는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서로의 영혼을 나누는 것.
너와 나 사이의 오솔길에는 바로 깨달음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상호작용이라고 하더라만
어쨌거나 당신들이 찾아야 할 것은
입자나 질량이나 평행우주 따위가 아니라
21세기 식 낭만주의, 바로 깨달음이다.
말하건대 태초에 빛이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새로 태어나는 너의 영혼에 빛이 있다.
네 영혼의 태초를 맞이하라!
“빛이 있으라!”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