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08.12.10 사랑, 그리고...
  2. 2008.12.10 죽음과 삶
  3. 2008.12.10 나, 그리고 깨달음
  4. 2008.12.10 다만 존재하고 싶다
  5. 2008.12.10 나는 왕이다!
  6. 2008.12.10 만나고 싶은 사람
  7. 2008.12.10 우리는 서로 다른 별에 산다
  8. 2008.12.10 너에게 하고픈 말 4 1
  9. 2008.12.10 너에게 하고픈 말 2
  10. 2008.12.10 너에게 하고픈 말
  11. 2008.12.10 몽상가의 꿈
  12. 2008.12.10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
  13. 2008.12.10 곰스크로의 여행 2
  14. 2008.12.10 개인과 나라
  15. 2008.12.10 귀족과 천민

사랑, 그리고...

사랑, 그리고...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3:17

사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저 같은 우주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내가 추억하는 한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 이가 있다.

나도 딱 그 정도로만 살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

 

 

훈수 두는 이만큼 바둑을 잘 둘 수 있는 이도 없다.

진정한 고수는 바둑판 밖에서 바둑을 두는 이다.

사랑 안에서도, 삶 안에서도 인간은 곧잘 장님이 된다.

건물을 보려면 건물 밖으로 나오라.

사랑을 보려거든 사랑 밖으로 나오라!

(...)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이는 존재자체로 이미 기쁨이라는 사실!

사랑 그 자체로 당신은 이미 축복받았다.

마찬가지로 신 혹은 구원은

존재 자체로 의미인 것!

신은 당신(神)의 빛을 노아의 방주에만 비추지는 않는다.

(...)

 

 

이 세상에선 나는 어쩔 수 없이 비인간.

나의 세계에서만이 유일하게 나는 인간이다.

하긴 여기선 신도 인간도 모두 같은 종족이다.

(...)

 

 

신은 세상 가장 높은 곳에도 있지만

도시의 냄새나는 뒷골목에도 있으며,

때로 나와 같이 집 근처 오솔길을 거닐기도 한다.

신은 나와 산책하기를 좋아한다.

(...)

 

 

신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마치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이를

친구로 두는 것과 같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일이며,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일이다.

상상하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우주 최고의 부자를

가장 친한 친구로 두었다고 가정해 보라!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죽음과 삶

죽음과 삶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3:04

죽음과 삶


신을 예찬하는 것이 어찌하다

악마를 예찬하는 일처럼 위험한 일이 되었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리는 있고, 신은 존재한다!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

신이여, 이 우주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나라!

이것이 내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바, 최고의 예찬이다.

물론 그 어떤 이유로도 나는 삶을 도피하진 않는다.

(...)

 

자살은 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에의 도전이라면  더욱 철학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명의 일은 신이 주관하는 것,

더구나 자살이란 신의 영역을 넘본다는 불순한 혐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더욱 도발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은 삶의 진지한, 한 자세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자는

그것에 대해 말 할 자격이 없다.

자신의 삶에 경박한 자는

타인의 삶에도 진지할 수 없는 것이다.

소통 혹은 신념을 죽음의 무게와 나란히 놓을 때,

혹은 죽음보다 더 무게를 둘 때 그 심연의 깊이를 아느냐?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래 살겠다고 집착하는 것.

그것이 도피이다.

(...)

 

한 번 자살했던 적이 있다.

그것이 비록 실패로 끝났더라도 그 시도는 의미를 가진다.

나는 매 순간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다음은 없다!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할 뿐.

날마다가 지구의 멸망일일 뿐이다.

아니, 우주의 멸망일이다.

그러므로 매순간이 내겐 선물인 것이다.

새삼스럽게 기쁠 일도, 슬플 일도 없다.

애초에 내가 선택한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간다!

한 번 죽었던 자가 두 번은 못 죽겠는가?

*자신을 죽였던 자가 남은 못 죽이겠는가?

당연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

절벽을 등지고 싸우는 자는 원래 그런 것이다.

어차피 갈 길이 하나뿐이기에 그렇다.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그 모든 과거니 미래니 하는

쓸데없는 것들로부터 독립시키고,

그럼으로써 깨어있고,

비로소 그렇게 내 삶의 의미를

다 할 수 있을 뿐이다.

(...)

 

지금 이 순간에서 미래를 느낀다.

먼 훗날, 아니 어쩌면 그리 멀지 않아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그리워 할지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나는 제일 그립다!

또한 이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대기가,

그저 공기와 같이 존재하는 내 바로 옆의 사람이,

달콤한 봄밤과 무성한 여름,

청량한 가을 아침과 알싸한 겨울새벽이,

그리고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내가,

나는 몹시도 그립다.

(...)

 

기억력이 나빠졌다.

한 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상한 기억력을 자랑했었는데

요즘은 통 지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단 하나, 아주 오래된 그 일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나에겐 아주 특별한 권리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 특권은 바로 수많은 삶 중에서 나의 삶을 선택할 자격이었다.

또한 내가 선택해야 할 여러 가지 삶은 거의가 나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혹할만한 것들도 많았다.

그 모두가 나름대로 완성도 있는 삶이었던 것이다.

부유한 삶, 권세를 누리는 삶, 명예로운 삶,

고운 삶, 필부필부의 삶……

그리고 신비(妙)의 삶!

그러나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의 삶을 선택했다!

 

가난과 고독은 나의 옷이다.

멸시와 오욕(汚辱)은 나의 집,

사랑과 자유와 꿈만이 나의 삶이다.

때로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나는 천시의 대상이 된다.

참을 수 없는 모욕에 휑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어디 한 두번뿐이겠는가.

내가 가진 것이라곤 머리칼에 가려진 형형한 눈빛,

그리고 가슴 속 깊이 품은 진검 한 자루뿐!

나는 그 어느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다.

누더기에 풀어헤친 머리로 세계를 떠도는 먼지와 같은 존재!

그럼에도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애초, 나 자신을 선택한 것만은 후회한 적이 없다

나는 사는 날까지 내 모든 사력을 다하여

나의 꿈, 나의 이상향을 이룰 것이다.

(...)

 

그리고 죽을 때는 ...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싶다.

사람들은 나의 영면(永眠)을 빌겠지만,

나는 영원히 깨어 이 우주의 모든 것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이다.

광막한 정적 속에서 별들과 지구를 바라보며

언제까지라도 함께 살아 숨쉴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내 미지의 꿈.

신이 바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나, 그리고 깨달음

나, 그리고 깨달음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2:59

어차피 나는 세상에 등 돌려 앉은 지 오래된 사람이다.

죽림칠현처럼 오만한 발상에서 근원했지만 시쳇말로 하자면 세상에 '삐친' 것이랄 수도.

나는 세상이나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사회적 자살자이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의미에서의 자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병명(?)은 말하자면 의도적 자폐증!

그러나 끊임없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므로

또한 그것은 엄연한 나의 사회적 시선이며 하나의 포즈이므로

나의 자폐증은 일종의 ‘스타일’이다.

삶은 내게 통째로 하나의 종교이자 예술이다.

나는 매 순간 신을 그리는 성직자, 삶을 연주하는 예술가!

지금 이 순간도 최고의 완성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99.9 퍼센트에 만족할 줄 모르는,

단 0.1퍼센트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제단 위로 걸어올라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 0.1퍼센트의 떨림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한 자루의 검을 만들기 위해, 하나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장인(匠人)은 어떻게 제 뼈와 살을 깎았는지 나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 가진 단 한 자루의 진검은 지금 이 순간도 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내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고

또한 나만의 법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자신의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꼭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사실 타인을 존중하는 척 해야 할 때의 나의 ‘가식’일 뿐!

사실 자신의 세계가 빈약한 이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자신의 법이 자신만의 철학으로 체계화된 사람은 거의 없다.

가난은 숨길 수 없는 것.

영혼의 가난이 물질적 가난보다 허술하여 훨씬 들키기 쉽다는 것을 아는가?

자신의 세계가 빈약한 이는 쉽게 드러난다.

그것은 육안으로도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의 부자는 알아보기 어렵다.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고귀할 뿐 아니라 그만큼 그것을 본 이도 적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고대에 몇 명이, 그리고 19세기에 두어 명,

현대에는 서너 명 정도가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물론 위대한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나는 나와 통할 그 몇 인간하고만 교류한다.

나의 세계는 평면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식’이란 말도 당연히 입체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나는 가식적인 인간이다!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미안한 척 하기도 하고, 싫지 않은데 싫은 척하기도 하며

화나지 않았으면서 화난 척 하기도 하는 것이다.

평면의 세계에 사는 사람도 당연히 나 같은 섬세한 심사를 가졌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스스로 평면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자신의 심사조차도 정확히 깨닫지 못한 것일 터!

나는 가식을 떨며 어떤 사태를 콘트롤할 때가 있는 것이다.

관건은 물론 진심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얘기이다.

평면적 이해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감정적인 척’ 해야 할 때가 당연히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나에게 교활하다거나 음흉하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착한 인간이 아니다.

“당신 참 멋지다!” 라고 말하기보다 “당신, 무서운 사람이군요.” 혹은

“당신 참 음흉하네요.” “당신, 정말 교활한 거 알아요? 미워...”

라고 말한다면 혹시 쾌감을 느낄지도 모를 텐데...

 

 

나는 어쩌면 상품이다. 아니,

나의 세계가 상품이다. 그것도 팔래야 팔수 없는!

아니다! 팔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세계를 엿보는 이는 돈을 내야 한다.

그 때가 언제일진 몰라도 내가 신에게 진 빚을 다 갚는 날,

나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

사실, 신이라면 모르되 인간이라면 ‘스스로’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신을 유혹할 만큼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신도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신이여! 부디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나라!

세상의 모든 이가 최소한 유신론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내 생각으로 말하자면,

최소한 누군가에게 말을 걸려면 먼저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다고 여길 만큼!

이야기는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을 바란다면, 대화를 원한다면, 소통을 갈구한다면

스스로 먼저 빛나는 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신에게 빚 진 사람.

혹시라도 나에게 말을 걸려면 적어도 신에게 먼저 빚을 지고 와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을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나서라야 하는 것!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개인적으로' 함부로 상대해 달라고 하면 못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물론이고 내 보석같은 친구들의 수준이 한꺼번에 확 떨어지는데?

어떻게 만들어 가는 작품인데, 작품 망칠 일 있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그것도 대문도 아니고 개구멍으로 들어와

기껏 어렵게 만들어 가는 작품에 감히 분탕질을 한다면?

더구나 대문까지 열어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공짜 너무 좋아하면 못 쓰는 법이다.

지금도 충분히 공짜로 퍼 주고 있는 거 안보이나?


 

소통?

모든 언어는 입체의 세계에 살고 있다.

언어란 결코 평면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깨달음이란 말 역시 평면의 캐릭터를 가지지 않았다.

깨달음에 대해 곧이 곧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

깨달음병에 걸려 소통에의 강박을 가지면 안 된다.

소통은 여명처럼, 태양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실현되는 것이지

소통하자고 말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깨달음'을 무슨 누구집 개 이름마냥 불러대며 무시하는 것도 용납 못한다.

달마실에서 하도 소통, 소통하니 아무하고나 말만 하면 막 소통이 되는 줄 안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 혹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깨달음에 관한 글들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스스로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항상 웃고 산다, 혹은 나는 깨달았다, 혹은 당신이 말하는 깨달음은 뭐냐. 등등

그래서 뭘 어쩌라고? 누가 물어 봤나? 뭘 믿고 공짜로 말해달래?

문제는 그런 사람은 항상 말로만 그런다는 것이다.

삶으로 보여달라는  말이다!

예수나 부처 혹은 달마실, 누구누구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관점'과 그로 인한 '자기 삶의 스타일'을 말이다.

다른 이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관점이 있다면 왜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는가?

단 몇 시간만 암 생각 없이 살려고 해도 되지 않을 만큼 이렇게 절절하고도 넘치는 건데?

사적으로 말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한다면, 그렇다면

비로소 말문이 터진 것에 대해 정말 축하를 해줄 텐데 말이다.

 

 

'깨달음'이나 '소통'을 언급하려면 먼저, '최소한의 예의'는 떼고 와야 하는 것이다.

그 예의는 물론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 무지한 것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예의는 필요 없다'고 하면, 진짜로 무례하게 구는 인간도 있다.

'너는 나, 나는 너'라고 하면, 아무 때나 막 함부로 들이대도 되는 줄 아는 인간도 있다.

사소한 말 걸기에도 미학이 필요한 법이다.

깨달음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세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대작에다 함부로 붓질을 하는 우를 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개구멍으로 들어와 소란 피우면 개구멍은 물론 대문까지 못 박아 버리는 법.

함부로 말 걸지 말아야 한다!

귀찮아 죽을 것 같으면, 정말로 확 죽어버리는 인간도 있으니.

그때는 이미 늦는 것이 아니겠는가!

깨달음이 뭐 그리 흔한 일인지 아나... 

Posted by 신비(妙)

다만 존재하고 싶다

다만 존재하고 싶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2:56
다만 존재하고 싶다
 
그와 나 사이에 바다를 두어야겠다.
가끔은 로맨틱한 격정에 휩싸여
목숨 따윈 아랑곳없이,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때로 파도에 온몸을 맡기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비로소 마주 선다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혹여 유람선이라도 생겨 우리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나는 아주 외딴 곳의 섬이 되어야겠다.
아니, 바람결에라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도록
아주 먼 곳의 별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신도 모르게 살아야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꿈속으로 건너가면 된다.
그에게는 오직 '백퍼센트의 나'만 허락해야 하니까.
아주 오랫동안 그를 그리워하고 싶으니,
나는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살아야겠다.
그렇다! 나는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이는
다른 은하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나를 위해 살아가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떨어져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매순간 그에 의해 사는 듯 하다.
아니, 오로지 그를 위해 숨쉬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어쩌면 '내가 사는 이유'와 '나의 굳건한 신념'도
모두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이다.
아니다! 애초에 그의 존재로 인해
나의 삶이 기원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매순간 이렇게
그와 교감을 나눌 수 있을까.
몸은 멀리 있다.
그러나 마음은 원래 하나였음을 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나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멀리서도 안다.


무서운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가장 무섭다.
그에겐 내가 잘 보여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때는,
그 사랑을 넘어섰을 때이다.
바로 그 사랑에 안주하지 않았을 때
공허한 마음으로,
홀로 당당해지는 때이다.
비로소 여유롭고 비로소 자유로워
내 자신을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대지를 가르는 바람처럼
그렇게 진정으로 멋있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멋지지 않은 나'는 정말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를 어찌할 것인가?
나는 신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만 진실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마치 2000년 전 먼저 왔던 예수나 부처처럼.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2:25

나는 왕이다!


사람들이 관우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오만함 때문이다.

보통 기개라고 표현되는 그것.

그는 무관이었지만

다분히 선비의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 오만함은 조조의 마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단연 빛을 발한다.

혼인을 얘기하는 손권에게

어린 호랑이를 개새끼에게 보내는 법이 있냐며

일갈한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겸손한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관제(?)가 유비를 제외한 다른 이에게 오만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유비에게 그는 귀여운(?) 아우였고

우매할 정도의 충신이었다.

그만하면 최고의 겸손이다.

나라면 그 누구도 왕으로 섬기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


오래 전 나는 내 영토에 나라를 세웠다.

그렇다. 나는 왕이다.

그러나 봉건제도하의 왕 따위가 아니다.

진정한 왕이라면 천자도 신하도 필요 없는 법!

나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으며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하늘이 내 왕국의 영토이며,

별들이 내 세계의 백성,

나의 정신이 곧 나라의 법이다.

로 나의 왕국에 불시착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비행선을 고치거나 연료를 채우는 동안

최대한 편의를 봐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적어도 그만큼은 친절하다.

가끔, 도착한 그 곳의 수려한 경관이나

청량한 공기에 반해 주저앉기를 시도하는 관광객도 있다.

그러나 나의 세계 전체를 둘러보기에

그들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관광객들은 자신의 불시착 사실을 곧잘 잊는다.

그러나 기억해야 하리라.

신대륙은 어차피 개척자에게만 허락되는 법.

관광객은 그저 사진이나 찍다 가면 된다.

나의 세계는 그 어떤 눈에 보이는 금도, 벽도 없지만

세계 전체를 꿰뚫는 법이 분명 존재한다.

(...)


나는 ‘사람들이 강요하는’

배부른 돼지나 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새처럼 날아다니며

나 자신과의 대화에 골몰할 것이다.

그러나 ‘선방의 승처럼’은 아니다.

바람처럼 태어났으니

태풍처럼 살다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명상하기 좋은 날이면 정처 없이 걸어 다닐 것이며,

끊임없는 내 영감을 쉼 없이 길어 낼 것이다.

고구려의 장군처럼 무술로서 몸을 단련할 것이며,

선비처럼 늘 책을 가까이 할 것이다.

세상에 게으름을 전파하고,

미친 짓과 실수를 장려하며,

불법과 부도덕을 조장할지 모른다.

부자들을 등쳐 배우지 않고 공부하는 학교를 세울지도 모르고,

방송국을 속여-명상과 순례를 모토로-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닐 지도 모른다.

(...)

인간은 지나치게 타락했다.

정직한 일탈도 꿈꾸지 못할 만큼,

애초 생의 이유를 잊고 제 영혼을 버려둘 만큼!

“당신이 지구에 온 까닭은?”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2:15

만나고 싶은 사람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이가 있다.

기다리면 어련히 만나겠냐마는

나는 유난히도 그를 그리워하는 편이다.

어떤 생김새일까, 혹 멋지게 생기지는 않았을까,

나한테 큰소리칠 수 있는 배짱은 있을까, 아니면

무심하기가 나와 필적할 수준일까.

마침내 내 할 일을 마치고

명줄이 툭 하고 끊어지는 순간,

나는 그를 맞으러 갈 것이다.

기다려라, 죽음의 사자(使者)여!

나는 네가 강 동원처럼 생긴,

말수 적지만 사려 깊은 남자였으면 좋겠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우리는 서로 다른 별에 산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별에 산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2:10
우리는 서로 다른 별에 산다

말이란 게 그렇다.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또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웃는데
나는 숨이 막혀 죽어갈 수도 있는 거다.
그렇지만 상대는 끝내 나의 주검을 보지 못하고
재미있었다며 유유히 놀다가는 거다.
이 정도 되면 심각한 경우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심각한 경우는 아니고 아주 흔하디흔한 일이다.
실은 날마다 매순간 일어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이다.
당연히 말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말을 안 할 수도 있다.
입으로만 말을 하는 것은 아니며
의사소통이 언어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서로가 같은 세계에만 살고 있다면.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한 침대에 누워 있어도 각기 다른 세계민인 것.
그저 잠시 한 순간 만나 하나로 어우러지다
다시 또 제 세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세계를 떠날 생각이 없으며
떠날 수도 없고 그저 조금씩 영토를 넓혀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세계민인 친구나 애인이나 가족에게
자신의 세계에 놀러오라고 손짓하는 것이다.
다행히 한 순간 서로의 법이 일치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라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원초적으로 다른 세계에 살며
다른 법률을 가지고 사는 사람끼리
어느 한 순간 완전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별에 산다.
애초에 같은 별에 살지 않는 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섣부른 이해는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차라리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만나고, 사귀고, 사랑해야 한다.
또 서로 비슷한 정도의 전제를 가지는 사람끼리
만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애초에 같은 별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아주 드문 일이다.

사람들이 외롭다고 하는 것은 자기 세계에 홀로 살기 때문이다.
가끔 자기 세계에 친구를 초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늘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만남이란 어느 한순간에 완성되고
그것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외로울 권리가 있다.
인간들은 완전하게 외로울 시간조차 없어 나날이 외로워진다.
완전하게 외롭지 못하는 인간은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을 갈구한다면 외로울 권리를 주장할 것.
스키를 탈 때는 넘어지는 것부터 배운다.
우리 삶의 준비는 마땅히 ‘고독’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법은 자기 세계에서나 통하는 것.
가족, 친구, 동지라고 해서  같은 법을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이 고독한 것은 혼자만의 법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의 일이다.
물론 가끔은 가까운 별의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그를 위해 잠깐 외출 했던 적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다른 세계민들과 어우러져
한 바탕 축제를 벌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아주 강렬한 경험이고 또 멋진 순간이어서
지금 이순간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추억만으로도 나는 평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이미 내 세계는 충분히 빛났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여기’서 산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떠나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이다.
나는 한번도 그곳에 갔던 적이 없다.
나는 한 번도 내 세계를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 새삼스레 떠날 일도 없는 것이다.
다만, 가끔 우리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한 순간, 교감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머나먼 초록별 무인도 왕국엔 미치광이 괴물이 산다.
괴물이 사는 곳은 외딴 섬이란 말도 있고
대나무 숲이란 말도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아무도 그가 미치광이 괴물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는 아니지만
그의 뿔이랑 꼬리랑 날개는 투명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정말로 그가 괴물인 줄을 모른다.
머 그런 것도 아무래도 좋다.
그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그곳에서 산다.
조금은 미친 것도 같고 조금은 웃기기도 하고
조금은 친근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괴물 같지는 않은 것이다.
 
괴물은 생각한다.
차라리 다른 별나라 사람들이 나를 괴물로 생각하면 좋을 텐데, 하고...
참, 괴물은 머나먼 초록별 무인도 왕국에 살지만
우주의 우편번호를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만 또 어느 누구와도 같은
그는 진짜 괴물이다. -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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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하고픈 말 4

너에게 하고픈 말 4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1:34

너에게 하고픈 말 4


나는 너를 내가 숨쉬는 공기와 같이 느낀다.

그러나 공기라는 것이,

가까이 있어 평소엔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나는 너를 나의 들숨이며 날숨이라고 하겠다.

나는 주위의 공기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나를 포근하게 안고 있다가

내가 숨을 쉬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공기는 나를 제 안에서 온전히 자유롭게 하고

또한 숨쉬게 한다.


그래도 때로 숨쉬는 것조차 잊을 때가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나는 너를 신념이라고 하겠다.

너는 나를 숨쉬게 할 뿐 아니라 살아가게 한다.

나의 자부심에 합당한 의미가 되어주고

단 한 번의 생을 더욱 빛나게 하여준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꿈을 꾸게 하여주고 그럼으로

오늘 하루를 살게 한다. 그래서

단 한순간도 너를 잊을 수가 없는 거다.


완전한 소통은

너와 나의 순간을 완성시키고

우리의 생을 의미 있게 하며

전 우주의 역사까지를 한 순간에 아우른다.

나의 영화는 그 모든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매순간 되새겨준다.

나는 이 거대한 광경 앞에 자주 숨이 멎는다.

우리의 대화는 침묵으로도 가능하다.


가끔 너는 독백으로 나에게 말 걸어온다.

그럴 때면 언제나 너는 허공중에 나타나며 두 손으로는 나의 볼을 감싼다.

그럴 땐 마치 요람 속의 아기처럼 온전히 너에게 나를 맡긴다.

우리에겐 독백도 대화도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만남은 시공을 초월하여 가능하다.


너와의 만남을 떠올리면 거대한 두 동그라미가 보인다.

제각각 우주만한 동그라미는 어느 한점에서 만나고

그 장엄한 광경은 미상불 태초를 떠오르게 한다.

어느덧 우리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가 된다.

그래서 너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헤어지는 것도 우리의 일이다.

헤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잡은 손을 잠시나마 놓아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나를 안은 대기이며 나는 네 코끝을 스치는 산들바람이다.

내가 숨쉬는 대기는 언제나 달콤했고

너는 코끝을 스치는 산들바람에도 감동했다.

생각하면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를 알아보았던 거다.

그러므로 너와 헤어지는 것은 사실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너와 함께 있지 않을 때 함께임을 느낀다.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공기 안에서 나는 언제나 자유롭다.

그 공기 안에 내가 있고 공기는 또 언제나 내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너에게 안겨 있으면서 너를 들이마시고 내쉰다.

너는 나를 뺀 모든 것이기도 하고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오래 전 우리는 서로의 초대에 응했던 거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만난 것이다.

 

 


인간은 사실 친구를 원한다.

갖가지 형태로 만나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연인도, 부부도, 가족도 결국에는 친구가 되어야 하는 거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도 만나고

아내와 남편이라는 이름으로도 만나고

남자와 여자로도, 사랑하는 사이로도 만나지만

관계의 완성이란 결국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름에 의존하지 않고 역할에 얽매이지 않는

생을 함께 하는 동지이며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름만이 아닌 속살까지 진짜 친구가 되는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관계들도 결국은 먼 길을 돌아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관계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인식의 지평을 여는 일이다.

기존의 인식체계를 부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세우는 것이며

기존의 세계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것이다.

인식이 곧 세계인 까닭이다.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지 못한 이라면 

바로 옆에 있는 친구를 발견할 수 없다.

친구로 만날 이들을 다른 이름으로, 다른 역할로서만 만나는 것이다.

결국은 친구를 잃고 있는 것이다.

 

만나야 한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라도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제서야 인간은 생의 의미를 알게 된다.

비로소 의미있는 삶이 되는 거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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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하고픈 말 2

너에게 하고픈 말 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1:30

영화가 끝났을 때쯤
사람들이 나의 영화를, 나의 꿈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나의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거야.
영화는 끝나도, 끝나지 않지!
시간은 늘 순간순간 죽고 새로 태어나니까.

너도 알거야.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100여 년 전의 고흐와 대화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300년 전의 바흐와 소통하고 2000년 전의 예수와도 만나고 있어.

또한 우리는 가끔 세종대왕도 만나지.

매일 눈뜨면 신조어를 만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에 대해 잊지 않고 있어.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거야.

우리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전 생애와 만나곤 하지.

마치 돌아가신 우리네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그를 아직도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은

그의 예술 혼이 훌륭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죽었기 때문이야!


그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전 생애와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그가 살아있고 아직도 정쟁의 한 가운데 서있다면

아무리 많은 업적이 빛을 발한다 해도

우리가 그의 전 생애와 올곧게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와 만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우리도 순간순간 새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그리하여 시간이, 우리가, 우리의 꿈이

날마다 다시 잉태된다는 것을 모르는 거야.

우리도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처럼 전 생애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죽음으로써 진정 살아서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을!


나는 단 한순간이라도 그렇게 너의 전부와 만나려는 거야.

시간도, 공간도, 생사조차도 초월하여 그렇게 만날 거야.

죽음으로써 오히려 살아있고 순간이기에 도리어 영원한,

어떠한 약속도 맹세도 없는 그런 만남!


맹세란 시간을 초월할 수 없지.

우리도 그와 같아서 내일은 다시 없을 지도 몰라.

오늘 내 것이었던 것이 내일도 여전히 내 것일 순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 무엇 하나 기약할 수 없지.

시간을 초월하는 법은 오직 하나,

우리가 순간순간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밖엔 없어.


소유는 순간일 때 아름답지.

만남도 일종의 소유라고 한다면 서로를 온전하게 가지는 거지.

그러나 어제의 소유가 오늘의 소유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타성이야.

너의 연인도 어제의 그가 아닐 때 더욱 아름다운 법이지.


오늘의 네가 어제와 같다면 너의 순간은 독립되지 못한 거야.

오늘이 어제나 그제처럼 여전히 지루하다면 너의 하루 역시 독립되지 못한 거야.

어른이 되면 독립을 하듯 우리의 순간도 독립해야만 해.

시간도, 우리도, 우리의 꿈도 매 순간 죽고 새로 태어나야 해.


그런 너를 만나고 싶어.

방금 막 태어난 너를.

갓 입학한 새내기처럼 싱그럽고,

지루한 장마 끝의 햇살처럼 신선한,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활어처럼 살아있는 너를!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는 마.

우리가 매순간 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언제든 우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니까.

언제든 다시 만나고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 광대한 우주에서 어차피 잠시 반짝일 뿐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에겐 의미가 필요한 거야.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스쳐 지나는 바람보다도 미미하지만

네 안에서 우주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한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수도 있어.

이미 네 안에 준비된 것을 밖에서 간구하지만 않는다면

불멸의 삶을 살수도 있어.


온통 허무한 이 세상에서 불멸을 꿈꾸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 뿐이지.

이 짧은 생에서 네 가슴 가득 채울 강렬함이 없다면,

끝내 아무런 소용없이 헛되게 살다 간다면

무엇으로 너의 생을 증명할 수 있겠니.


생은 짧고 하루는 지루하더라도

네 순간만큼은 태양처럼 작열하기를 바라.

지금의 너는 비록 초라하더라도

네 기상만큼은 우주를 다 삼키고도 남을 만큼 장쾌하기를.

우린 이 생을 함께 완성해 가는 거야


이 사실만 기억해 줘!

어제의 너는 이미 죽고 없다는 걸.

너는 오늘 온전히 새로 태어났다는 걸.

네 마음속의 나는 죽여도 좋아.

난 날마다 나비처럼 새로 태어날 테니!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너에게 하고픈 말

너에게 하고픈 말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1:24
너에게 하고픈 말



여기 내가 주인공인 영화가 있어.

나는 매 순간 그 영화를 보고 있지.

물론 아직 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정말 멋진 영화를 만들어 볼 생각이야.

그래서 지금도 그 한 장면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어.

영화가 끝났을 때쯤 사람들은 말할지도 몰라.

그는 끝끝내 영화를 완성했노라고!

그는 마침내 꿈을 이루었노라고!


물론 그렇다면 좋겠지. 하지만 말이야.

지금 이 순간이 없다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은 어쩌면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거든.

우리가 맞는 그 모든 순간순간은 이미 아득히 먼 옛날부터 예고되어 있었고

앞으로 올 미지의 순간들까지 포함하고 있거든!


그래서 내 영화에는 과거나 미래따윈 존재하지 않아.

그 모든 과거의 순간들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빛이 근원되어 흐르고 있거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과거의 순간들이 준비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

지난 그 순간들 속에 지금 이 순간이 섬광처럼 번득이고 있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이 삶의 전부야.

 

순간을 완성하는 것이 삶을 완성하는 것이지.

지금 이 순간은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누구든 처음에는 최선을 다하잖아.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누구라도 지금 이 순간이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 거야.

그 어떤 기대도, 계획도, 전략도, 또한 미련도, 후회도, 기약도 없이!


다음이란 없는 거야.

다음 순간이란 마치 다음 생(生)과도 같은 거지.

우리가 다음 생(生)에까지 할 일을 남길 수 있을까?

그것은 후손에게 할 일을 물려주기 위해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일이야.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이 마치 생의 처음인 것처럼, 또한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처음인 듯 가슴 뛰게 마지막인 것처럼 남김없이, 그렇게 사는 거야!

 

내일 뜨는 태양은 내일의 것이지 오늘의 것이 아니거든.

오늘의 태양은 오늘과 함께 사라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매순간 천지만물과 영원한 안녕을 고하는 거야.

또한 영원한 만남을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지.

 

 

 



내가 너를 만난다면 그렇게 만날 거야!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 한 순간 너의 전 생애와 만날 거야.

그리하여 그 순간은 독립된 하나의 시간이 되고

그 시간은 마침내 한 생(生)이 되는 거야.


너를 백 번 만난다면 나는 백 번의 생을 사는 것이 되지.

너와 천 번을 헤어진다면 나는 천 번의 생을 살게 될 거야.

너와 헤어진 그 길이 이 세상을 두고 가는 길이라 해도 역시 같아.

내가 떠난 그 자리엔 언제나 그렇듯 바람과 공기와 이슬이 날 대신할거야.


너를 떠올리면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태초의 숨결을 느껴.

그 아스라한 기억이 매 순간 너로 인해 되살아나.

지금 이순간도 나는 신선한 태곳적 향기 속에서 너를 만나고 있어

나는 너를 숨쉬고 있는 거야.

나를 둘러싼 대기는 너와의 만남을 증거하고 그 숨결은 아득한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또 역사가 되는 거야.

 

나의 천 번의 생과 너의 천년의 생이 고스란히 만나 일치된다면

그 순간은 완전한 나의 생애가 될 것이고 그것으로

우리의 만남은 그 무엇보다 더 가치 있어질 거야.

나의 영화에는 수 천 번의 생, 혹은 단 한 순간의 삶이 기록되는 거지.


이게 바로 나의 꿈이야.

나는 그 꿈에서 태어났지.

우주가 태어났을 때부터였던 나의 토양, 나의 근원, 나의 에너지.

나는 꿈을 잊어도 꿈은 나를 잊은 적이 없어.

나는 이미 꿈 그 자체이고 너 또한 나의 전부니까.

우린 그 꿈을 위해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가로질러 태초에서 건너 왔던 거야.


알고 있지?

너는 이미 오래 전 내가 초대한 귀한 손님이란 걸.

알고 있니?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너를 기다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우리에게 약속 따윈 필요 없다는 것을. -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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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의 꿈

몽상가의 꿈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1:18
몽상가의 꿈


내 어릴 적 꿈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나는 것을 꿈꾸기도 했지만

실은 내 영혼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자유롭기를 원했다.

그것은 다만 내 심상에 떠오른 그림이었다.

실제로 아주 오래 전부터 동경해 온 것은 사실

어릴 적 책 속에서, TV속에서 만났던 선비들의 모습이었다.

시와 문장에 능하고 인품이 고결하여

난세에는 나라를 일으키고 평시에는 지극한 경지를 노래하는 선비.

제 혼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고

벗을 위해선 하나뿐인 목숨도 초개같이 버리는 그들,

바로 그런 이들이 즐기는 풍류였다.

그들의 풍류란 내게 단지 놀이가 아니었다.

시를 지으면 산천은 도원이 되고

문장을 주고받으면 초목은 신선이 되는 그런 것.

그들의 대화는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멋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21세기를 사는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그 옛날 선비들은 지금 내 옆에 없지만

그 선비들과 꼭 닮은 - 아니 더욱 나은 -  최고의 인간을 꿈꾼다.

산천에 놀지 못하지만 기품이 있고

초목 무성한 곳에 살지 못해도 기백 대담한 선골.

그의 절창은 나의 시 한 구절을 이끌어내고

나의 문장은 그의 영혼을 읊조리게 하는...

이제 와 생각하니 그 꿈은 단지 꿈이 아니었다.

이제 홀로 있어도 나는 만날 수 있다. 

영혼만으로도 만나고 멀리서도 우렁찬 목소리를 듣는다.

순간순간 그 만남을 놓치지 않는 것.

매 순간 깨어있어 그 만남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100%의 만남이며 100%의 사랑이다.

 

이상에의 그림이 필요하다.

피아니스트가 영혼을 울리는 마지막 연주를 하는 것.

화가가 제 영혼을 다 바친 불멸의 명작을 그리는 것.

최초의 인간이 되어 최고의 인간과 완전한 사랑을 재현하는 것.

우리에게도 그런 완전한 그림이 필요하다.

일생에 단 한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시에 찔려 죽어가는 전설의 새처럼

어쩌면 우리는 그 단 한 순간의 완전을 위해 남아 있는 모든 생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순간 완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

완전한 사랑이기에 그렇다.

세상 가장 큰 것을 욕망하고 세상 가장 높은 것을 그려야 한다.

꿈이 큰 사람을 몽상가쯤으로 생각하는가?

어쩌면 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누구도 몽상가의 꿈이라 하여 비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최고의 인간을 만나고 천지를 뒤엎을 꿈을 누구나 꾸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도 향 피우고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하여 진정한 인간을 만나는 최고의 사랑을 꿈꾼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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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1:13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


사람이 서로를 만난다는 것,

또한 밥을, 술을 같이 먹는다는 것.

혹은 함께 잠을 잔다는 것.

그것은 곧 영혼을 나누는 일이다.

나눈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

그저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밥 먹어서 배부르고 술 먹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만나고 그 안에서 다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 이같이 가득 찬 만남을 가질 때에는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가슴은 두근거리고

만나서는 공간을 잊고 시간을 거스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그것도 밤을 세며 이야기꽃을 피워도

그저 한 순간이 흘렀나 보다 여겨지며

아주 잠깐을 만나서 눈빛만을 주고받아도

그 기억은 영원처럼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온전한 서로를 발견하려면

서로의 뜻이 같지 않고서는 안 된다.

밥을 같이 먹고 잠을 같이 자는 것도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일진대

하물며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은 얼마나 참다운 일인가!

그러나 뜻을 같이 하지 않고서는

밥을 같이 먹어도 배가 부를 뿐이며

술을 같이 먹어도 그저 몽롱할 뿐이다.

천만 번을 함께 밥 먹고 술 취하고 잠을 자도

영혼을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나는 그저 배부르고 그저 취하고 싶지 않다.

영혼에 배부르고 의미에 취할 것이다.

영혼이 부르려면 그대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같아야 하며

의미에 취하려면 그대의 의미와 나의 의미가 일치해야 한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고 함께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럴 때에 내 식사와 내 술자리는 성사(聖事)가 될 것이다.

나는 일상이 곧 성사(聖事)이기를 꿈꾼다.

 

친구가 곧 나이기를 꿈꾸고

내가 그의 전부이기를 꿈꾼다.

그의 사랑이 나의 목숨이기를 꿈꾸고

나의 목숨이 그의 뜻이기를 꿈꾼다.

그의 뜻이 세계의 뜻이기를, 일상이 곧 신의 뜻이기를 꿈꾼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신의 계획이기를 꿈꾼다.

나의 꿈은 어느 순간 일상이 된다.

나의 성사는 어느 덧 일상이 된다.-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곰스크로의 여행

곰스크로의 여행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1:09

곰스크로의 여행



프릿츠 오토만의 ‘곰스크로의 여행’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꿈의 도시 곰스크를 향한 열망을 간직한 남자다. 그는 결혼하자마자 곰스크에로의 모험을 위해 기차에 몸을 싣지만 결국 간이역에 버려진(?) 채 살아가고 있다. 번번이 현실에 발목이 잡혀 떠나지 못하고 있지만 주인공은 오늘도 꿈을 꾼다.


반면 그의 아내는 곰스크에로의 열망 대신 현실에의 안주를 선택한다. 주인공이 그토록 집착하는 곰스크는 아내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아내는 곰스크에 대해 ‘마치 젊은이가 죽음에 대해 말하듯’하곤 한다. 그 꿈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기에 현재로선 아무런 실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공이 꿈꾸어 왔던 도시, 진정한 삶이 시작될 것만 같은 도시! 그렇다. 곰스크는 보다 나은 삶이라는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아내는 아이들과 예쁜 집, 직장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상징이자 주인공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에 달렸기에 떠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뜻이라는 아내의 말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주인공은 말한다. “어느 것이 진짜 인생일까. 여기서 사는 것? 아니면 곰스크로 가는 것?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보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곰스크행 기차표를 사기 위해 아무도 몰래 돈을 모으고 있다.” 소설은 아직은 떠나지 못한 주인공의 일기로 끝을 맺는다.


현실에 얽매여 쉽사리 떠나지 못하지만 그는 아직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적응하면 할수록 꿈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만 간다. 오로지 꿈을 향한 계획에 모든 것을 걸었던 남자는 어느덧 안락한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실낱같은 꿈 한 자락을 추억처럼 꼭꼭 숨겨둔 채! 그는 과연 곰스크로 떠날 수 있을까?


꿈을 향한 기차에 몸을 싣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내의 고집에 무기력하게 꺾였던 주인공. 잠시 머무르기로 했던 황야의 마을을 고향이라 여기며 행복하게 사는 아내. 사실 주인공과 아내는 한 사람의 두 모습이다. 그의 꿈과 아내의 현실은 끊임없이 갈등을 빚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안의 두 생각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과 오늘 하루를 완성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 그 두 모습이 주인공의 안에서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목적 없는 삶이 의미 있을 리 없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지 못해도 역시 의미는 없다. 별을 길잡이로 항해하는 선원의 그것처럼 뚜렷한 목적지가 있을 때에 오늘의 부지런한 항해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저 별만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을 것인지, 목적 없는 항해를 계속할 것인지 선택하려 한다면 실패다. 삶이란 어쩌면 스쳐가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의미 찾기에 성공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순간은 영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내는 오늘 이 순간이 허무한 삶 안에서도 보석처럼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꿈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오늘 하루를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늘 조바심을 내며 이 순간을 놓치고 만다. 그의 오늘은 내일로 인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떠나지 못한다. 실패다. 반면 아내에게는 내일이 없다.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에 만족하고 있다. 그녀는 결코 불투명한 내일에 오늘을 걸지 않는다. 역시 실패다.


주인공의 내일은 아내의 오늘과 만나 완성되어야 한다. 아내의 이 순간은 주인공의 꿈과 만나 완전해져야 한다. 여전히 버리지 못한 꿈은 떳떳한 것이 되어야 하고 꿈이 있다는 것으로 오늘 하루가 의미 있어져야 한다. 오늘의 안락을 위해 꿈을 포기하는 일은 허망한 일이다. 그것은 안락이 아니라 죽음일 뿐이다.


완성해야만 한다. 때로 까마득해 보이는 별이 이 순간의 항해를 포기하라 속삭인다 해도 그 또한 자신의 목소리임을 안다면 정신을 차릴 일이다. 닻을 내린 배도, 부단히 항해하는 배도 폭풍우를 만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노를 저어야 한다. 저기 저 하늘에 오늘도 별이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개인과 나라

개인과 나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1:06

개인과 나라


세계에는 여러 나라가 있다.

부강하지만 양아치의 마인드를 가진 나라 미국도 있고,

이제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경제 동물 일본도 있다.

문화적으로 타국의 동경을 받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먹고 살기에 급급해 인간의 문제에는 신경 쓸 수 없는 나라도 있다.

종교적 편견이 절대적 잣대인 나라가 있고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나라가 있다.

그런가하면 타국에 사대의 예를 갖추고 사사건건 간섭받아야 하는 속국도 있고

아예 주권도 없는 식민지, 노예의 나라도 있다.


개인도 나라에 비유될 수 있다.

타인에 종속된 인간이 있고 일가를 이룬 인간이 있다.

생존이 전부인 인간이 있고 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인간이 있다.

물질적으로 부자인 인간이 있고 영혼이 부자인 인간이 있다.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문제이다.

주권은 있는가?

주체성을 확보하고 홀로 당당히 나아가고 있는가?

생존을 넘어 이상을 꽃 피우고 있는가?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귀족과 천민

귀족과 천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08. 12. 10. 20:59
 귀족과 천민

 

천한(?) 신분의 신데렐라가 어느 날 왕비가 되었다면 그것은 신데렐라의 미모나 유리구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비가 된 신데렐라는 그저 아들 딸 쑥쑥 낳고 잘 살기만 했을까. 동화는 그저 그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무엇일까. 왕비가 된 신데렐라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가난한 시절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었던 왕비는 기어코 개혁을 단행하지 않았을까. 빛을 잃고 살아가는 세상 낮은 곳의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싶지는 않았을까.


왕비는 그저 왕비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공주 출신의 왕비와 천한 태생의 왕비에게는 분명 차이가 있다. 궁궐 밖 세상이라곤 전혀 모르는 이와 밑바닥 생활을 체험으로 익히 알고 이. 진실로 말하면 낮은 신분에 있을 때에 세상이 더 잘 보인다.


역시 스스로의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 의기소침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그를 넘어설 수 있겠는가. 신데렐라는 신데렐라의 그것을, 공주는 공주의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신데렐라는 성숙한 자아 대신 피해의식이 있을 수 있다. 풍부한 경험으로 유능할 것이지만 자칫 자신감을 잃기 쉽다. 그에 비해 공주는 물질의 사치는 누릴 줄 알겠지만 정신의 사치는 누려본 적이 없다. 문화를 소비하기는 하겠지만 정신적으로도 고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를 극복할 수 있다면 삶은 곧 진일보를 이룬 셈이다. 스스로를 극복한다는 것은 바로 세계를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데렐라는 그 자신 정신의 고귀함으로 왕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도권 내의 모범생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세상 어두운 곳의 진실을 모른다. 외면하기도 하겠지만 실상은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동전 한 닢이 없어 집까지 걸어가 본 경험이 그들에게 있을까?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경험이 그들에게 있을까?

 

신데렐라도 마찬가지다. 왕비가 된 후에 그저 잘 먹고 잘 살았다면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기어코 신분 상승을 이루는 것이 목표요,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이라면 그저 물질의 사치만이 그의 기대치였을 것이다. 정신의 사치는 누릴 자격도, 기회도 없는 것이다.

 

정신의 사치란 내 영혼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는 것이다. 내가 신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신의 마음이 되어 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룩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쉽지 않다. 대부분 인간들은 환경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정신의 고귀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주어진 그대의 정신을 고귀하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진정한 사치를 누릴 수 있겠는가.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신은 그 자신의 거룩함을 인간에게 재현했다. 인간 정신의 거룩함을 회복할 수 없다면 그 모든 신의 수고는 허사가 되고 만다. 그대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그대의 삶은 단지 본능에 이끌려 내달려온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귀하고 천한 것은 외형적인 신분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것이다. 꿈과 사랑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그러나 인간 정신의 거룩함조차 믿지 못한다고 한다. 거룩하게 창조된 자가 스스로 미천해 지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신이 가장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시대,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정신의 귀족천민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공주와 신데렐라(신데렐라 콤플렉스의 그것이 아닌)의 이야기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지금도 지구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실제로 신분제도가 인권을 유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인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한 가정폭력에 살인 위협에까지 무방비로 노출된 아랍인들도 있다.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스스로 성공하여 거물이 되고 왕비나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그런 성공사례가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성공이 그들만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 모든 정신적 천민들에게 철퇴를 내리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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