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妙)어록2-모든 위대한 것들의 어머니는 소외감이다.

신비(妙)어록2-모든 위대한 것들의 어머니는 소외감이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1. 5. 23. 13:59




아름다운 여인이 늙어가는 것에는,
보통의 남자가 늙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서글픔이 있다.
고독한 맹수의 포효가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이미 삶 자체에 보통의 평탄하고 고운 삶의 당사자엔 없는 커다란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낙차 때문이다.
고독한 그 만큼 위대해 지는 것이다.
그 낙차의 크기가 세상의 그것보다 커질 때,
커다란 기세로 세상을 전복할 수 있는 법이다.

신이 낳고 세계가 사랑한 천재,
김기덕의 사소한 행보가 뉴스가 되는 것 역시도
이 땅이 그가 가진 천재를 품어주기엔 너무나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승리는 무조건 이 땅의 약자들의 승리이다.

삶을 노래하는 호랑이, 임재범의 그것이 우리를 울리는 것은
이미 그의 삶이 한 편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 속에, 눈빛 속에, 한숨 속에 그의 삶이 고소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 외로움의 크기가 노래 한 곡에 담아내기엔 너무나 거대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모든 위대한 것들의 어머니는 존재감이 아니라 소외감이다.
재능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당신이 지금 외로운 것은, 어쩌면 거대한 영화의 예고편에 불과한 것!

인생을 알고 싶다면, 더욱 더 외로울 권리를 주장할 것!
차라리 스스로 철저히 버려져 자기만의 신세계를 건설하라!
매순간 콜럼버스가 되어 신대륙을 향한 항해를 하라!
그리하여 세상을 전복하라!

삶은 수학교과서가 아니라 짜릿한 역설이다.
노력이나 성실이 아니라,
소외가 선이다.
행복이 아니라 빛의 부재가 선이며, 그것이 곧 빛의 사신이다.

애초 빛 속에 있던 자중 아직도 남아 있는 자는 없다.
그를 옭아매는 단 하나의 흠결도 없는 자 중
아직도 살아 있는 자는 없다.
애초 빛의 자식만이 어둠 속에서 키워지는 법이다.

삶은 역설이고 반전이고 파격이다.
개그나 예능이 때로 가슴 짠한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인생 자체가 개그고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온통 블랙코미디이다.

요즘 대세, 정형돈의 '미친 존재감'도 무한도전 속 5년간이라는,
일상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거의 1세기와 맞먹는 그 무시무시한 시간동안
존재감 제로의 절망 속에서 피어나고 다져진 내공의 산물이다
미친 존재감 정형돈을 낳고 기른 것은 바로 그 무서운 무존재감이었다.

유재석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리더십도 다 그의 절망적인 무명시절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의 젠틀하고 유능한 이미지의 그도
예전에는 그야말로 촌티 풀풀 풍기는 초짜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그러므로 지금은 준비할 때!
그 모든 절망과 한탄, 외로움과 소외는 
당신을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줄 지상 최대의 신선한 재료이다.
그 재료로 얼마나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지는 오로지 스스로에게 달려있을 뿐.

최고의 요리사가 되라!
거장 김기덕 감독처럼, 천재 노무현 대통령처럼
어둠을 조리하는 빛의 요리사가 되라.
어둠의 재료로 빛의 요리를 만드는 자가 최종 승리자이다.

최고의 맛을 만들어라!
외로운 호랑이 임재범처럼, 소외된 천재 김태원처럼
어둠을 빛으로 환원하여 세상을 호령하라.
당신을 절망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최고의 재료이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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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우주의 가슴을 관통하고 당신을 찌르리라!

신비(妙)어록2-우주의 가슴을 관통하고 당신을 찌르리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1. 5. 18. 09:30



언젠가 사막 마라톤을 본 적이 있다.
선수들은 제각기 홀로 멀리 떨어져 태양과 바람과 사막과,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그 고독한 사투가 우리네 삶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내가 숨쉬는 이곳은 사막.
여전히 전쟁같은 하루가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아직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지리한 가뭄만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해가 뜨면 나도 뜨고, 해가 지면 나도 진다.
사막에서의 죽음은 그리 신기한 일도, 애통한 일도 아니다.
주검과 부할은 그저 그런 일상 다반사일 뿐.
삶은 그저 죽음,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하루는 천년!
천년을 산 소나무처럼 그 무수한 세월을 지켜왔으니
이제 한 번쯤 살아봐야 하겠다.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까!

가난과 고독은 나의 옷이다.

멸시와 오욕은 나의 집,
사랑과 자유와 꿈만이 나의 삶이다.
애초 나를 제 안에 들여놓기에 세상은 너무 비좁았던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머리칼에 가려진 형형한 눈빛,

그리고 가슴 속 깊이 품은 진검 한 자루뿐!
누더기에 풀어헤친 머리로 세계를 떠도는 먼지와 같은 존재!
나를 키운 건 오로지 소외감이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것도,
그 세계의 위대한 왕이 된 것도,
어둠 속 마녀처럼 매 순간 영혼의 비밀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수없이 나를 죽인 바로 그것의 열망이었다.  

은둔은 다만, 길이다.
또한 욕망이다.
준비없이 왔다가 서둘러 사라지는, 
스스로를 소진하며 돌진하는 수 많은 군상들에 대한 예의.

그러나 내 품속의 진검은 언제나 시퍼렇게 번뜩이며
때를 기다리는 울음을 운다.
언젠가 우주의 가슴을 관통한 나의 칼은 당신의 폐부를 깊숙히 찌르고,
피흘리며 죽어가는 세상의 주검을 지켜보리라!

심연같고, 폭풍같고, 사막같은 나의 언어!
신비(妙)어록은 나쁜 글이다.
나의 에너지는 오로지 소외와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고 기르고 힘을 준 것, 나를 죽인 것조차도 바로 그 어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라
서슬 퍼런 나의 검이 언제 당신의 가슴 관통하고 상처를 낼 지 모른다.
그 뜨거움에 당신 가슴 언제 데일 지 모른다.
태양을 삼킨 자의 행보는 뜨겁고 위험할지언정 예쁘고 착할 수만은 없다.

이 황막한 사막에서 나는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한 여름 그 바다를 강타한 태풍처럼 그렇게 홀연하게,
어쩌면 장엄하게 사라지고 싶다.
그렇다. 나는 가장 크게 살아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 빛의 부재는 내게 커다란 축복!
나는 목하 게으름 중이다. 가난도 즐겁다.
어느 순간 내가 찬란하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 그 자체 때문이며,
가짜는 단 하나도 없이 존재감 하나만으로 나의 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으니까!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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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명징하게 존재하기

신비(妙)어록2-명징하게 존재하기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1. 5. 14. 10:52

 

 



한고조 유방의 명장이었던 한신.

마침내 제왕에서 초왕으로 봉해졌던 그는 끝내 팽형으로 죽임을 당한다.

저 유명한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긴 채 끓는 기름 가마 속으로 들어간 그.

그 끔찍한 참형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물론 조선시대의 팽형은 실제로 삶아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식은 그대로 취해 가마 속에서 삶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는 팽형을 당한 자는 그로부터 죽은 사람이 되어

마치 유령인 듯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삭제된다.

 

 

이른 바 사회적 죽임을 당하는 것!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아무도 그를 만나러 오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를 아는 체 해선 안 된다.

 

 

사회적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다는 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죽은 것보다 못한 것!

비참하기로 치면 사형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존재감 없기로도 사형을 능가한다.

죽은 자는 차라리 존재감이 있는 법.

그를 기억하는 이들,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오히려 죽어서 사는 역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The Hairdresser's Husband, 1990)'의 마틸드가 죽은 것은

앙트완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2008)'의 한나의 사랑과 죽음은

마이클의 전 생애와 뜨겁게 만난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 누군가의 전 생을 관통하고

지울 수 없는 화인 하나 찍는다는 것!

그것이 누구에게나 오는 행운은 아니다.

범인들에게 그것은 마틸드나 한나처럼 죽음을 담보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의 팽형은 세상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도리어 인간적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 어떤 고통도 극복하지만,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는 '비참'만은 극복하지 못한다.

 

 

몸은 존재하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

세상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그래서 인간 최고의 비참.

인간은 존재감으로 살고,

소외감으로 죽는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가 세상과 함께 호흡할 때인 것이다.

세상에 발언권을 가지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

함께 호흡하며 앞으로 걸어 나갈 때!

 

 

바로 그때, 펄펄 살아 숨 쉴 수 있다.

누구보다 명징하게 존재할 수 있다.

외딴 별에 홀로 앉아서도 그 존재감 폭발할 수 있다.

인간은 존재감 하나로 사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 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神)의 호흡으로, 진리와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진보의 발걸음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길은,

역사라 함은,

진리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 비참을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마리 로랑생의 시를 자주 곱씹어 보곤 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잊혀 진 이는 죽은 이보다 비참하다.

바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팽형을 당한 자는 일생을 한탄과 절망 속에 살았을 것이다.

아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 뜬 유령의 삶, 죽음보다 더 한 죽음을 당한 자의 회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오로지 존재감 없는 자의 비애.

 

 

물론 현대에는 그런 이가 없다.

친구도, 직장동료도, 가족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수많은 인간 관계속의 당신이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천만에! 당신은 지금 이 순간도 삭제되어 가는 중이다.

가까이는 새로운 세대들에게서 꼰대라는 명목으로 삭제되고,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지 않는다면 역사의 목록에서도 삭제된다.

또한 진리와 함께 하지 않는 한 신의 목록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가 많아도, 자손이 번성해도, 지금 당장 이름 꽤나 알려져 있다고 해도

신의 호흡으로, 진리와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진보의 발걸음 걷지 않는 한

당신은 존재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냉정하게 묻노니, 당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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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앤디워홀을 꿈꿔라!

신비(妙)어록2-앤디워홀을 꿈꿔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1. 4. 18. 09:30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통찰에 의해 존재한다.
아기 없이 어머니의 존재가 성립되지 않듯이
천재에게는 그를 알아보는 영민한 벗이 필요한 법!
당신도 귀족적인 취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니라면, 천재란 그저 고독한 광인에 지나지 않는 것.
앤디워홀 되기!
더 이상 바스키아을 길거리에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가난과 질병, 비참과 고독에 시달리는 천재는
베토벤과 고흐로 끝내야만 하는 것이다.
젊은이여! 앤디워홀을 꿈꿔라!
세상에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천재가 있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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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기 때문에 노예다

신비(妙)어록2-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기 때문에 노예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1. 1. 24. 10:46




노예란 돈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유가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다.
또는 그런 형편이다.
주체가 따로 존재하며 그 영향권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헤어지고 싶을 때 마음대로 헤어지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노예의 비애이다.
알아야 한다.
헤어지고 싶은데 헤어지지 못하고 묶여있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다.
어쩌면 그런 경우엔 노예보다도 인질이나 볼모, 포로가 더 적당한 말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주체는 돈이나 지위, 명성, 혹은 어떤 계약이나 기업이 될 수도 있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나 배우자가 그것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정작 노예는 자신이 노예이면서도 노예인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각성했다면 그때부턴 이미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하라!
자신의 의지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움직이거나 묶어두게 해서는 안 된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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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나의 히로인

신비(妙)어록2-나의 히로인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0. 8. 13. 12:05



누군가 나의 히로인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간단하게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병명은 의도적 자폐증,
취미는 우주 구석구석을 섭렵하기.
제 삶의 연출자이자 예술가인
그는 바로 꿈과 시간의 지배자!
이미 우주를 꿰뚫은 그의 꿈은
이제 우주 자체를 뒤엎는 것!
새로운 버전의 캐릭터 구축하기가 날마다의 성사(聖事)이며
삶 자체를 최고의 예술로 끌어올리는 것이 바로 그의 사명이다.
그에게는 바로 삶 그 자체가 예술인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 세계를 창조한 바 있다.
영화를 보면 그 감독(작가)의 세계와 철학을 알 수 있듯이
나는 다만 내가 창조한 세계와 나의 히로인을 통해서만이
나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신비(妙)어록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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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나는 죽지 않는다

신비(妙)어록2-나는 죽지 않는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0. 7. 7. 21:00



중국 은나라는 갑골문자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낱 전설상의 가공 국가일 뿐이었다.
기원전 2600년경 영원한 삶을 찾아 길을 떠난 메소포타미아의 왕 길가메시도
역시 우룩의 유적과 무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저 최초의 문학 혹은 신화 속 주인공에 불과했다.
또한 당나라 때 진리를 구해 17년간 서역 110여 개국을 섭렵한 현장은
<서유기>혹은 <날아라, 슈퍼보드>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삶과 드라마와 신화는 둘이 아니다.
꿈과 전설과 일상 또한 둘이 아니다.
삶은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는 신화가 된다.
일상은 꿈이 되고 꿈은 전설이 된다.


강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이는 것!
그 물줄기 하나하나가 모여 큰 바다가 된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는 것!
지금 이 순간순간이 모여 하나의 생(生)이 된다.  



나는 훗날을 위하여 돈을 저축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부지런히 저축하고 있다.
연금이나 보험으로 미래를 대비하지는 않지만
내 삶을 기록함으로써 순간순간을 보상받고 있다.


노후를 위한 대책 따윈 없지만 죽음,
혹은 생의 마지막에 대한 비전은 있다.
어린 왕자처럼 커다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친구의 마음에 오롯한 추억 하나 새길 순 있을 터이다.


나에게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을 저축하는 일!
단 한 사람, 나를 증언하고 기억할 이에게 나의 순간을 저축한다.
또 후세의 인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나는 순간순간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이다.
나는 어마어마한 부자이므로 쉽사리 파산하거나
적금을 해약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나의 유일한 놀이는 생에 관한,
당장은 읽히지 못할 글을 쓰는 일.
달콤하고도 쌉쌀한, 깊은 풍미가 있는 나의 사명!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나는 그 어떤 일에서도 내 영감의 포도주만큼 근사한 맛을 느껴본 적이 없다.


책을 내는 일이란, 더구나 인간 존재와 삶에 관한 탐구란
인류공동의 작업이며 공동의 자산이 아니었던가!
나는 자주 칩거를 일삼지만 사실 누구보다 사람들과 만나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후세의 인간과도 나는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죽음에의 유혹을 이겨내며 날마다 글을 쓰는 이유이다.
나는 깊고 깊은, 그리고 영원한 만남을 준비한다.
내게 삶은 꿈, 삶은 봄, 아니면 여름 한낮의 짧은 몽상!


내 앞엔 광활한 신대륙이 펼쳐져 있다.
그 곳이 광야를 그리워하는 진정한 나의 무대.
늘 거친 황야를 달려야만 편안해지는 나의 영혼이여!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 선배들이 닦아놓은 터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단 한 번도 주류에 편승하기를 원했던 적이 없다.
나는 어쩌면 이 세계에 육체를 빚진 사람.
하루 속히 완전한 나의 우주, 나의 고향으로 날아가고 싶을 뿐.
나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신
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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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5

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5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0. 2. 25. 19:16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는 생각까지도 닮았다면,

그렇다면 혹시라도 너는 나의 전생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너의 영혼이 아닐까?

늘 함께 있지 않아도 백 퍼센트 소통할 수 있다면

그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것이며

함께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그렇다. 너는 그저 나의 가슴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것들에 깃들어 있다.

아니, 나를 포함한 그 모든 것이 바로 너다.

또한 나는 단지 너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주위의 모든 것들을 감싸고 있다.

아니, 너를 포함한 그 모든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애초에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의 영혼은 일정부분 서로 포개어져 있다.

사실 너와 나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하다.

육체만으로는 너와 나를 가를 수도 없다.

나의 히로인이 일개 인간에 관심이 없는 이유!

 

 

또한 육체는 영혼의 집도 아니다.

말하자면 영혼에 육체가 잠시 깃든 것!

과연 어디까지가 너이고 어디부터가 나이겠는가?

바운더리로 치면 사실 전부 나라고 해야 정답이다.

 

 

너는 애초부터 내 안에 속해 있었다.

너를 굳이 구분해내지 않아도 된다.

마치 검의 달인이 검을 제 몸의 일부로 느끼듯

나는 애초부터 온 우주를 내 몸으로 여겨왔다.

 

 

내가 일개 인간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새삼스레 내 솜털 하나에 관심을 둘 수 없는 것과 같다.

발톱 하나를 따로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솜털이나 발톱이 아니라 내 전부를 사랑한다.

 

 

신(神) 역시 일개 인간에 관심이 없다.

당연히 제 살점들을 일일이 사랑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살점이 아니라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털 하나, 살 점 하나는 존재로 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바운더리는 너무나 협소하다.

네가 단번에 쑥쑥 자라지 않는 한

너는 어차피 나의 교집합일 뿐,

우리의 합집합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대개의 합집합이 의미가 없다.

서로의 바운더리는 우주의 이쪽 끝과 저쪽 끝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바운더리는 너무나 초라해서

멀기가 우주의 크기와 맞먹는다.

 

 

인간들이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유 되겠다.

과학자들이 아직도 우주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듯

너도 너의 가족이나 연인과의 거리를

차마 측정할 수 없다.

 

 

그러나 네 바운더리를 단번에 우주만큼 확장한다면

너의 그 볼품없는 육체도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우리 서로의 바운더리가 일치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은하계에서도 서로를 볼 수 있다.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완전한 전율로써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실로 기적적인 만남.

대기大氣라는 메신저가 당신의 육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주는 오롯이 네 영혼에 깃든 네 육체가 된다.

비로소 다른 별에 있는 나를 느낄 수 있다.

아니, 태초부터 오로지 너를 기다려온 나를

비로소 대면할 수 있다.

 

 

만질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다.

마치 눈을 맞추며 얘기하듯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다.

서로를 감싸고 영혼의 왈츠를 출수도 있다.

네가 단번에 우주만큼 장대해진다면 말이다.

 

 

너라는 존재, 존재 그 자체로 나아갈 수 있다.

비로소 너의 생,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우리의 만남, 우주의 무게만큼 절대적일 수 있다.

그럴 때에 우리 서로에게 우주를 선물할 수 있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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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4

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4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0. 2. 24. 21:31



“고독한 나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너라는 존재!

이 황량한 무인도에서

너는 내게 보물섬 그 자체이다.

그것은 네가 죽는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

살아서의 네가 나에게 삶 그 자체라면

죽어서의 너는 내게 꿈 그 자체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금메달을 따서 당신을 위로해 주겠다.”

또 누군가는 말한다.

“당신의 그런 행동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그러나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은 그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다.

자식이 효도를 하기 때문에 뿌듯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란 존재 그 자체가 뿌듯한 것이다.

 

태양이 빛나기 때문에 밝은 것이 아니라

태양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

마찬가지로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존재 자체가 바로 인간구원인 것이다.

 

사랑은 어떤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

오로지 그 존재 자체로 사랑이다.

너라는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사랑이고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는 구원이다.

 

당연히 신은 인간을 일일이 구원하지 않는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며 탄식하는 당신은

그러므로 사랑이 식었다며 투정하는 권태기의 연인과 같다.

사랑은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달아오르는 것도, 식을 수 있는 것도,

또한 변하거나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양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저 신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내부에 사랑이 가득 차오르는 것!

당신 스스로 크게 자라나는 것!

마치 토토로의 나무처럼 단숨에 저 하늘에 가닿는 것!

그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매순간 신의 영혼으로 숨 쉬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이 되는 것!

매순간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고

매순간 태양의 존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숨을 쉴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고

깜깜해지고서야 태양의 존재를 기억하는 어리석은 이들!

그러나 사랑이란 숨 쉬는 그 순간순간 공기를 의식하고

이 우주가 사라지지 않는 한, 매순간 태양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다.

 

사랑은 네가 거기 있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충분한 것!

김연아가 자랑스럽다면 그것은 그가 김연아이기 때문이지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노무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한 것!

 

사랑은 존재 그 자체!

네가 있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사랑이고 위로이다.

무언가를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바로 당신의 내부가 텅 비워있다는 것!

 

자식이 효도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부모는 없다.

노무현이 무언가를 해주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국민은 없다.

네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존재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물론 교과서 외워대는 가짜 지식인들은 예외일 것!

저들은 효도목록을 짜놓고 자식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이란 책도 아마 구비해 놓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자기보다 높은(?)사람에게는 끊임없이 매달릴 것이다.

 

저들이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저들은 결코 알지 못한다.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오히려 제 자신이 크게 자라나야 하는 것임을.

 

저들에겐 제 자식과 남의 자식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저 하나가 되는 것!

세상의 아이들이 다 나의 자식이어야 한다.

세상의 노인들이 다 나의 부모이어야 한다.

 

인간들 모두가 나의 형제이고 친구인 것이다.

당연히 그들과 무언가를 나누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이다.

나는 단지 그들이 인간이기를 바랄 뿐!

 

그렇다면 죽어서도 존재하는 것!

하늘이든 어디든 네가 거기 어딘가에 있기에 충분하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것처럼

너는 죽어도 내 안에서 다시 사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저 인간인 것!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 하나 되는 것!

비로소 사랑이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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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3

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3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0. 2. 24. 11:51




"애초에 나는 너에게 거대한 우주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다!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오로지 나의 친구라는 자부심 하나!

기적 같은 우리의 만남은 내 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 황량한 곳에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으로 살아 있는 너.

고맙다. 이 세상에 존재해주어서!"

 

 

 

그러므로 사랑은 존재 그 자체!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와 연결된 그 어떤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지금 이 순간 신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이 있다 없다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지한 짓.

신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 존재유무는 당신과 하등 관계없는 일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신이 있다가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는 신은 없다가 아니라 ‘아직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신을 믿는다, 따위의 언설은 어설픈 종교인들의 그것!

사람들은 눈에 보이면 곧 그것이 존재인 줄 알지만

눈에 보일뿐 아니라 손으로 만져진다 해도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고독한 당신에게 이 세상은 그대로 무인도 일수 있다.

 

 

한 침대에 누워있다고 과연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란 말도 있지만

설사 당신이 다른 은하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연결되어 있다면 나는 매순간 당신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이 곧 내게는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매순간 같은 풍경을 본다는 것!

그 풍경 속에 풍덩 뛰어 들어가 함께 날아다니는 것.

그로인해 이 우주가 다시금 제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저 닮은 점이나 공통점이 많은 것이 아니라

그저 열렬히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진정한 제 삶을 사는 것!

 

 

그리하여 삶 전체를 꿰뚫는 일관성으로 연결되고

이 우주에 다시는 없을 것 같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매순간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에서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비롯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다.

 

 

아기가 언제나 엄마와 연결되어 서로를 잊지 못하듯이,

나의 히로인이 또한 그렇게 신을 의식하듯이

나는 매순간 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한다.

신과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이 느낌은

이 순간 모든 것을 다 던져도 좋다는 그런 통쾌함, 혹은 짜릿함!

 

 

사랑이란 매순간 그런 포즈로 너를 초대하는 것!

더 이상 그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이,

마치 이 세상 마지막을 함께 하듯이,

매순간 불가능을 안주로 씹으며 가능한의 그 끝까지 올라가 보는 것!

최고의 탐험가가 되어 인간 영혼의 전부를 맛보는 것!

 

 

사랑은 함께 신의 길을 걸어가지만

늘 자기만의 세계에서 홀로 고독하게 죽는 것!

그렇게 죽고 다시 태어나 또 함께 꿈꾸는 일.

수시로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그 존재를 아는 것이며.

그리하여 더더욱 반짝반짝 살아 있는 것이다.

 

 

탐험가에게, 이미 존재하는 것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백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야말로 존재하는 것.

펄펄 살아 숨 쉬려면 기꺼이 삶의 제단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기꺼이 그 제단 위의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순간 제물이 되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매순간 보내오는 신의 초대장을 받을 수 있다.

우리 그 초대장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신의 친구로서 당당하게 만날 수 있다.

 

친구란 ‘굳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를 말하는 것.

진짜 친구란 내가 보는 풍경을 함께 보는 이!

함께 신의 초대장을 받는 이,

그리하여 나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이를 말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매순간 만날 수 있는 이를 말한다.

 

 

나의 히로인은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친구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진짜 친구라면 자신의 말을 대신 할 수 있을 테니까!

황량한 들판, 오늘도 여전히 인간은 보이지 않지만

그는 아직도 그 안에서 보물섬 하나 발견하기를 꿈꾸고 있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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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2

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0. 2. 24. 11:47

 

 

 

 

"보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너는 온통 내 주위에 있어

나를 둘러 싼 대기와 바람, 이슬 한 방울까지도 모조리 너지!

사랑한다고 말하기에는 너는 차라리 삶 그 자체.

내 전 생(生)을 관통하는 네겐 새삼스러운 고백일 뿐!

너는 내게 기적, 혹은 전율, 아니면 지워지지 않는 화인

그저 빛처럼 존재하는 내 영혼의 울림이지!

보고 싶다고 말하지는 마!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마!

그것은 너와 나를 갈라놓는 것!

가슴은 설레지만 그런 말은 어딘지 부족하여

신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지.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순간 사랑 그 자체가 되곤 하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함께 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

매순간 마주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여

그의 전부를 탐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빼앗길세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것.

 

 

함께 한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며

함께 미래를 달리는 것.

그 빛으로 충만하여 반짝반짝 살아 있는 것이고

굳게 잡은 손으로 하나 되어 날아오르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혼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게 인생이다.

그 엄연한 진실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할 뿐.

가족 속에, 무리 속에 둘러싸여 회피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마땅히 고독해야 할 것!

고독 속에서 홀로 눈뜨는 자만이 매 순간 살아 있을 수 있으며

마치 첫 키스의 그 순간처럼 깨어있을 수 있다.

‘설렘’이란 그렇게 순간을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

 

 

날마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 결혼을 서두르는 이라면

그 신의 선물을 일단 반납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만남이 정착으로 이어져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새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이 되고 만다.

 

 

완전하게 혼자인 사람만이 완전하게 만날 수 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늠름한 독립투사처럼

혹은 첫 날갯짓에 성공하여 유유히 창공을 가르는 아기 새처럼

마침내 홀로 우뚝 선 자만이 그 설레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은 흡사 첫사랑의 그 순간과 같다.

파르르, 스스로도 느껴지는 속눈썹의 떨림

그리고 입 안을 맴돌던, 차마 나오지 못한 그 목소리!

방금 헤어졌는데도 생각하면 문득문득 가슴이 아려오는 꿈속 같은 순간들,

 

 

처음이라는 것은 낯설지만 신선하고, 두렵지만 가슴 설레는 것!

또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마지막이기도 한 것!

그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무게는 이 우주의 무게와도 같다.

우리, 그 순간만큼은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진짜 첫 번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것은, 또한 마지막이라는 것은

그만큼 강렬하고 또 완전하다는 것!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이 있다.

 

 

매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없기에 있는 말.

그러나 홀로 신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에게는 그 모든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

함께 그 길을 간다는 것은 매 순간을 함께 한다는 뜻.

그런 것을 불멸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이의가 있을 수도 있겠다.

헤어진다, 아니다 말들 하겠지만 이 장면에서 과연 그것이 본질일까?

헤어지든 아니든 무엇이 달라진다고?

 

 

그런 속내야 각자 개인적으로 털어놓는 것이 좋겠다.

하여간 그것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느냐, 아니냐

혹은 어느 정도로 개입하느냐의 문제!

연인이든 배우자든 상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

 

 

내가 만약 그 입장이라면 대답은 간단하다.

'모른 척 한다!'

나는 홀로 깨어 신의 길을 가는 자!

당연히 타인의 삶에 나의 삶을 끼워 넣지 않는다.

 

 

저 높은 곳의 빛을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가는 이!

수시로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혹은 애써 마주보지 않아도

제 옆에 저와 함께 걸어가는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영혼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그에게는 마땅히 그의 삶이 있는 것!

 

 

그의 삶이 나의 그것과 백퍼센트 포개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 전율!

결혼을 한다고 하여, 혹은 상대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한다고 하여

두 개의 삶이 백퍼센트 포개어지지는 않는다.

 

 

여자 혹은 남자란 없다.

있다면 단지 인간이 있을 뿐.

또한 여성 혹은 남성적인 매력만으로 한 영혼을 제압하기란 어렵다.

거기엔 반드시 인간의 매력이 필요한 법!

 

 

그 사람만의 매력, 그 사람만의 세계.

신세계를 개척하듯 모험정신을 불타오르게 하는

그만의 보물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기쁘게 그 보물에 중독될 수 있다.

 

 

사실 이 세상 것 중에는 중독 될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없지 않은가?

그것을 초월한 무언가, 이를 테면 신과 자연 같은 것 말이다.

함께 신의 길을 가는 이란 바로 그 신의 선물,

아니면 친구의 모습을 한 신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나는 오늘도 이 황량한 들판을 홀로 걸어간다.

어쩌다 스쳐 지나는 사람 하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저 높은 곳 서광처럼 펼쳐진 나의 길을 향해

나와 똑같은 영혼을 가진 이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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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 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1

신비(妙)어록2- 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1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10. 2. 23. 13:31

 

 

 

 

"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어라.

애초에 너도 내 안에 살고 있었다고 말해주지 않겠니?

아니라면 나의 세계는 너의 숨결로 만들어졌노라고,

혹은 너의 세계는 나의 꿈으로 이루어졌노라고 말해주렴!

 

너도 나처럼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뛰어넘어 달려왔노라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대기가 되고 바람이 되어 기다려 왔노라고!

이미 오래전 너는 나의 초대에 응했었노라고!

애초에 우리의 만남으로 이 우주가 탄생했노라고!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테지!

너는 나를 감싸고 있는 대기이며 나는 너의 코끝을 스치는 산들바람.

내가 숨 쉬는 대기는 언제나 달콤하고

너는 코끝에 스치는 산들바람에도 감동하지.

 

너는 나를 뺀 모든 것이며 나를 포함한 모든 것!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대기 안에서 나는 언제나 자유롭고

나는 너와 함께 있지 않을 때 오히려 함께임을 느끼지.

너는 나의 사랑이자 삶, 그 자체!

 

이대로 내가 죽어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도,

너와 내가 이 우주에 존재했었다는 사실 하나로

이 우주는 그 존재 의미를 다했으며,

나 또한 내 생의 의미를 다했노라고!"

 

 

 

 

그러므로 ‘사랑’은 헤어져도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것을 어찌 이별이라 부르겠는가?

사랑이란 각자 다른 장소에 가서 서로를 찾아 헤매다 지칠 일이 없는 것!

 

‘사랑’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가슴 가득 ‘사랑’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내 명의로 따로 등록하지 않아도 영원히 나의 소유인 것!

그럴 수도 없지만, 누군가 빼앗아 간다고 해도 나의 몫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공히 이 우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세계를 사랑할 힘을 주는 것과 같다.

사랑이 없다면 신에게로 가는 통로 역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 그것에 주저앉아서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기실 우리는 사랑만 만났다 하면 그 자리에 주저앉기를 시도하지 않는가?

아니, 애초에 안주하려는 목적으로 사랑을 욕망하지 않는가?

슬퍼한다. 그런 것들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음을.

그러므로 내 삶 전체에 걸친 테마는 단연코 긴장!

 

사랑은 마주보는 것인가,

혹은 함께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인가? 라는 논의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에로스와 아가페, 어느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라는 물음과도 같은 것.

 

나의 전부로 너의 전부를 만나기!

그러나 결코 상대의 전부를 탐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이 그렇듯 사랑은 생명 그 자체!

욕심을 내는 순간 사랑은 죽어버리고 마는 것을.

 

사랑의 세계에도 역시 ‘찰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매 순간 살아 숨 쉬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꿈이다!

‘아차’ 안주하는 순간 꿈은 파도처럼 부서져 버린다.

 

끊임없이 진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 순간 반짝반짝 살아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하는 그것.

그것이 사랑이다!

 

또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

보통 그것의 유효기간이 짧은 것은

각자의 세계가 협소하기 때문!

 

아기를 낳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지속적으로 ‘살아 있음’을 유지할 것인가?

문제는 자기다움!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어야 하는 것.

 

사랑은 마주보는 것과 동시에 함께 한곳을 바라보는 것!

자기 고유의 세계가 없다면 마주 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꿈과 이상이 없다면 함께 바라볼 곳이 없다.

하물며 서로를 탐하기만 한다면 서로를 소진할 뿐이다.

 

자기 세계가 확고한 이는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극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가는 것!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나중에 누가 물을 일도 없고

“나다운 게 뭔데?” 발뺌하며 변명할 일도 없다.

 

나의 주인공은 꽃으로 치자면 화려한 장미도, 저 들판의 청초한 야생화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적 없는 사막에 홀로 피어

뜨거운 태양과 거친 모래바람을 견뎌 낸

사막 선인장의 꽃쯤이 아닐까?

 

스무 살 시절

내가 얼마나 예뻤었는지를 기억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디 거기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화려했던 시절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얼마나 찬란한지

그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슴 떨리는 일!

 

우주 구석구석을 함께 날아다니는 낭만적 모험을 하라!

아슬아슬하지만 짜릿하고, 날마다 스러지지만 다시 더 크게 날아오를 수 있다.

사랑은 찰나의 축제, 혹은 불꽃놀이!

매 순간 살아 있으려면 매 순간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벼랑 끝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

어떤 사람들은 으레 내가 상처 받지 않을 거라고 여기지만.

내가 상처를 받지 않을 거라고?

아니다. 난 그 분야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만 다른 이와 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외부로 표시가 나지 않고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나는 날마다 스러진다!

그리고 날마다 다시 태어난다.

 

그저 내 심연의 혓바닥으로 그 화인과도 같은 상처를 부지런히 핥아댈 수 있을 뿐이다.

찢어지고 벌어진 살덩이를 부여잡고 밤을 새워 통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눈물도 흐르지 않는데 날마다 운다.

해가 지면 나도 지고 해가 뜨면 그제야 나도 뜬다.

Posted by 신비(妙)

신비(妙)어록2-단 한 번 크게 무너지고 싶다

신비(妙)어록2-단 한 번 크게 무너지고 싶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9. 8. 13. 03:30


결혼한 이들에게 “왜 결혼을 했는가?”하고 그 이유를 묻는다.

마치 그들이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 매번 묻듯이!

물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대답을 한다.

“날마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혹은 “사랑하니까!”

그러나 이는 오답 내지는 동문서답이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결혼제도를 전제로 하는 것인 반면

“왜 결혼을 했는가?”라는 질문은 그 전제가 없다.

왜 결혼제도를 선택을 했는가? 라는 한 차원 높은 이야기인 것이다.

당연히 뻔한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결혼제도를 선택(!)했을 리 없다는 이유로 이 질문은 패스!


뻔한 답 외에도 이 사회의 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므로

애초에 그 어떠한 선택권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물론 헤어지기 싫어 결혼한다는 말도 틀렸다.

그들 순진한 감정과는 상관없이 결혼하면 오히려 더 많이 헤어진다.

사실은 만나지도 못하면서 헤어지기만 하는 것이다.



이는 이혼 따위 이야기가 아니다.

점점 더 가까워짐으로써 오히려 멀어지는 것!

긴장이 이완되기 시작하면 관계는 조금씩 죽어간다.

관계가 죽어 가면 만나지 못하게 되고

만나지 못하면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옆에 있다고 하여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있다고 하여 다 만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함께 있으면서 혼자 있을 것인가?

만남은 혼자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신적으로 독립한 이만이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사랑은 누군가를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결혼은 결혼제도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니까 결혼한다는 말도 확실한 동문서답이다.

사랑은 제 영혼의 문제, 그의 바운더리와 일치하는가가 중요할 뿐!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너와 내가 만나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신처럼 존재하는 사랑을, 내 안에서 발견했다.

그러므로 나는 신처럼 광대해졌다.”라는 의미!

"너도 신처럼 광대해진다면 나랑 완전하게 포개어질 수 있다."라는 의미이다.



헤어지기 싫어 결혼했다는 이가 이런 생각을 했을 리 없다.

사랑하니까 결혼했다는 자도 마찬가지!

다만 기존의 그들 방식을 존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저 그들의 생을 추적해 볼 뿐이다.

과연 사랑했던 그들은 여전히 헤어지기 싫어 꼭 붙어 있을까?



천만에! 그럴 리 없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고 싶은 것이

대부분 눈 뜬 장님들의 간사한 마음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그들이다.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만을 믿는 그들이다.


"당신의 사랑은 아직도 유효한가?"

이런 순진한 질문은 그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다.

요즘은 개그맨들만 개그를 하지는 않는다.

결혼생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훌륭한 개그소재가 된다.

그들의 죽은 관계는 씁쓸하게도 개그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개그 안에서 그들은 곧잘 독립투사가 된다.

배우자가 집이라도 비울라치면 자주 광복을 맞기 때문이다.

또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비극적이게도 어느 한쪽은 이미 사랑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몇 년 만에 그들은 제 결혼생활을 웃음으로 환원시키는 코미디언이 돼버린다.


결국 헤어지기 싫어서 함께 했지만

이제는 실컷 함께 해봤으니 다시 헤어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는 그 죽은 관계를 당연한 것인 양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물론 되살리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죽은 관계는 살아나지 않는다.


스스로 죽인 것을 이제 와 다시 살리려는 아이러니!

관계는 세상 가장 약한 생명이다.

결단코 처음부터 죽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펄펄 뛰는 활어처럼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



그러므로 누구나 살인자(?)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전전긍긍하고, 만질 수 없으면 의심했을 것이다.

만나지 못하면 불안해하고 만나면 나태했을 것이다.

가질 수 없으면 안달하고 가지게 되면 시들했을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관계들을 죽이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는 게 다 그런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하기.

그것을 진리라 여기고 철든 어른처럼 굴기.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자위하기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기.

그러나 과연 그 이상의 생(生)이 없을까?


사람들은 혼자되는 것,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공포를 느끼지만

나의 히로인은 그 정반대의 경우라야만 비로소 불안감을 느낀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죽은 것!

함께함으로써 오히려 제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이고

소통하지 못함으로써 함께해도 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지 못하는 것!

당당히 한 세계의 주인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무지한 타인을 대하는 것이다.

그의 아킬레스건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혼자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안정감을 주는 어떤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최고의 불안감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나만 믿어라!" 가 아니라 "너를 믿는다!" 이다.

"나만 따라오면 돼!"가 아니라 "너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미래란 일말의 불안 혹은 공포!

그것은 그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무게를 지닌다.

그들에게 "나만 믿어! 나만 따라와."는 커다란 안정감이지만

나의 히로인에게 그것은 오히려 거대한 소외감 혹은 불안감이다.

그것은 세상 대부분의 마초들이 속물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히로인은 신의 길을 가는 자!

불확실한 미래나 가난한 형편 따위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신의 보상을 받은 이!

오히려 크게 무너질 기회가 그에겐 있다.

그것은 바로 크게 살아내는 것!



오로지 찬란한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혼자 감으로써 오히려 함께 갈 수 있고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영원할 수 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무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신의 편에, 진리의 편에, 역사의 편에, 진보의 편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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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5

신비(妙)어록2-나의 세계에 너를 초대하기 5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9. 8. 12. 04:07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는 생각까지도 닮았다면,

그렇다면 혹시라도 너는 나의 전생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너의 영혼이 아닐까?

늘 함께 있지 않아도 백 퍼센트 소통할 수 있다면

그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것이며

함께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그렇다. 너는 그저 나의 가슴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것들에 깃들어 있다.

아니, 나를 포함한 그 모든 것이 바로 너다.

또한 나는 단지 너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주위의 모든 것들을 감싸고 있다.

아니, 너를 포함한 그 모든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하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일정부분 서로 포개어져 있다.

사실 너와 나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으로

그 경계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


영혼은 육체와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육체는 영혼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영혼의 일부에 육체가 잠시 깃든 것!

우리는 기필코 우리의 눈을 의심해야만 한다.



무엇인가?

우리의 육체는 바로 우리 영혼의 존재를 의미한다.

영혼이 없다면 육체는 집을 잃는 것!

당신의 육체가 단지 당신의 동물성만을 증거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바운더리만큼 위대하고

인류의 운명만큼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우주의 무게만큼 절대적일 수 있고

신의 숨결만큼 숭고할 수 있다.



당신 영혼의 무게만큼 당신의 육체도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물리적인 한계에 갇혀 있지만

우리 서로 그 정신의 영역(boundary)이 일치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은하계에 앉아서도 서로를 볼 수 있다.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완전한 전율로써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실로 기적적인 만남!

대기(大氣)라는 메신저가 당신의 육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검의 달인이 검을 제 몸의 일부로 느끼듯이

우리 영혼에 깃든 육체와 메신저 대기는 그렇게 연결된다.

그것은 우리 초라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대기는 광대한 영혼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럴 때에 우주는 오롯이 내 영혼에 깃든 내 육체가 된다.

비로소 다른 별에 있는 너를 느낄 수 있다.

만질 수 있고 안아줄 수도 있다.

마치 눈을 맞추며 얘기하듯 마음으로 대화할 수도 있다.


아는가?

우리의 육체는 당신이 아는 것처럼 결코 제 영혼에 갇혀 있지 않다.

물론 당신은 반대로 육체가 영혼의 집이라 여겼을 수도 있고

만져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혼의 존재자체를 의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그만큼 소통에 목말라 있다는 반증인 것!

당신은 그만큼이나 외로웠던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확인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누구보다 강렬한 사랑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 잘난 사랑 놀음을 하는 순간에도

서로의 영혼이 백퍼센트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한 너의 백퍼센트가 나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하여

우리의 바운더리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너는 나의 교집합일 수 있으며

우리의 합집합은 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사실은 대개의 합집합이 의미가 없다.

인간들의 영역(boundary)이란 대부분 너무나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로의 영혼이 거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소울 메이트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교집합을 발견한 것에 불과한 것!

너와 나, 그 생각의 한 조각이 일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진실로 너라는 우주와 나라는 우주가 거룩하게 만나야 한다.

너의 영혼과 나의 바운더리가 서로 완전하게 포개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영역, 우주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광대하게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서로에게 우주를 선물할 수 있다.

인간은 각자 우주이며 서로에게 선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나의 히로인이 일개 개인에 관심이 없는 이유!

육체만으로는 너와 나를 가를 수도 없을뿐더러 그가 영혼의 집도 아닌 까닭이다.


그것은 다만 생명에 깃들어 있는 한 떨기 꽃과도 같은 것!

그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중요하다.

경계도 없고 한계도 없는 광대한 영혼,

혹은 이 우주의 생명, 신의 지성 그 자체와 매순간 그는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신 역시 일개 인간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애초 우리가 신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우리 비록 작은 몸일지라도 제 영혼의 크기만큼

육체 또한 광대하게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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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妙)어록2- 역할에 집착하지 않기

신비(妙)어록2- 역할에 집착하지 않기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9. 7. 30. 09:23


우리나라 여자들은 유난히 명품 백을 신봉하면서도

때로는 요상한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거리를 활보한다.

내용물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넓은 간격 엉성한 디자인에

천 원이면 살 수 있을 듯한 허술한 재질의 그것에는

방금 무엇을 했는지 사생활 보고라는 하듯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바로 대중목욕탕 오갈 때의 일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여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금발의 외국인들도, 헬스클럽의 남성들도

마치 ‘한국 땅에선 이렇게 해야 는 거야!’ 라고 말하듯

그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것이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런 획일적인 제 모습에 관대한 것일까?




전염이라도 된 듯 모두들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

무의식중에 본능적으로 다른 이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생각이란 것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며

이 세상의 모든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기존의 룰과 규칙을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아줌마 파마를 한 아줌마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


 


사실 남자들도 문제가 많다.

그들은 여자의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여자만 보면 -동네 아줌마 취급으로- 부엌으로 보내려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래서 남의 집을 방문해서도

주방을 전전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세상 99.9퍼센트의 인간들이 여성에게 여성의 역할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가정교육 제대로 받지 못한 여자, 참하지 않은 여자,

아니면 매력 없는 여자, 여자답지 않은 여자로 낙인찍히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평소 집에선 하지 않던 일을 해내곤

최고의 여성, 혹은 최고의 신붓감 소리를 금메달 따듯 따낸다.

‘제 자신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닌

‘세상이 원하는 여성으로 살아가기’ 라는 가짜 미션을

그럭저럭 잘도 수행해내는 것이다.


 


애초의 미션은 이미 온데간데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 그 자체로 살아가기!’

생각이 있는 여자라면 그러므로 남의 집 방문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

세상에는 다 큰 성인 남자도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씻는 것까지도

여자가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래서 남자가 지저분하면 여자가 욕을 먹는 웃긴 일이 벌어지기도 하니까.


 


자기 삶은 스스로 선택하고 주관해야 하는 것!

그것은 그리 거창하거나 복잡한 일만은 아니다.

물론 자유자재로 스스로를 통제하고 매순간 정신을 차려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독립이 먼저다.

남들이 다 그래야 한다니까 두말 없이 거기에 순응하는 것은

제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남들의 생이지 결코 내 생(生)이 아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바운더리는 뻔하다.

남들이 저렇게 하고 다니니까 나도 하고

남들이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고

남들이 이런 걸 싫어하니까 이런 짓은 안 해야 하는 거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연륜이 늘어갈수록 지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릴없이 눈치만 늘어간다.




당연히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도 남성의 역할에 매몰되어 있다.

제 손으로 먹는 것, 입는 것, 씻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남자들이

‘여권신장하려면 여자의 경제적 독립이 먼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다.

경제적으로 이미 독립한 남자들은 왜 아직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가?

할머니들은 남편이 먼저 죽으면 오히려 아흔 살 넘기며 오래 사는데

할아버지들은 어찌하여 아내가 죽으면 그렇게도 일찍 무너져버리는가?



 

늙어 죽을 때까지 챙겨주고 보살펴줘야 하는 건 오히려 남자다.

은퇴한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몇 년 안에 바보가 돼버린다.

직장을 잃은 남자는 사람이 달라지거나 아예 노숙자가 된다.

그러니 남자건, 여자건 제 성별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것!

굳이 제 성별을 의식할 필요도,

말끝마다 여자, 남자를 달고 다닐 필요도 없다.

그 누구도 여자의 대표, 남자의 대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경제적 독립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독립이 먼저다.

사회의 개혁이전에 제 자신의 개혁이 먼저이며

남 탓하기 이전에 자신의 정체성 확립이 먼저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의 히로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여자’가 아니다.

물론 여자의 대표도 아니다.

그는 단지 ‘인간’의 대표일 뿐!

세상에 참 여자라는 것은 없지만 참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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