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인은 늙지 않는다!

지성인은 늙지 않는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6:24

"누군가 내게 말을 건다.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동시에 내 눈 깊숙이 그를 담는다.

내 눈으로 그가 성큼 들어온다.

그 순간, 다가오는 그의 몸을 통과하는 나 자신을 본다.

나는 유령처럼 투명하다.

다만, 아무도 느낄 수 없는 나를 느끼는 나 자신을 본다. "

 


인간을 떠올리면 별, 혹은 동그라미가 떠오른다.

흡사 어린왕자가 살던 소행성 정도의 모습이랄까.

동그란 땅덩이(?) 한 중간에 말뚝이 박혀 있고

우스꽝스럽지만 말뚝에 연결된 줄에 별의 주인이 묶여 있다.

물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줄은

주인의 행동반경에 따라 360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줄의 길이에 따라 별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줄의 길이가 비슷하거나 땅이 서로 가까이 있는 사람은

줄이 얽히고설키기 마련이며 이것이 인연이며 인과이다.

드물게 이 줄이 아주 긴 사람도, 줄을 끊고 비상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인간은 각자 그렇게 이 우주 공간을 떠도는 별이다!

 

 

인생길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져 다시 혼자가 되는 사람들.

아무리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혼자임을 느낄 수 있다.

아니, 결코 혼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독은 그렇게 더욱 더 풍요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 황폐한 도시에 나 말고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나 ‘척’ 또한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베스트프렌드이다.

나도 늘 배구공 윌슨과 이야기하고 신과 이야기하고

나 자신과 이야기한다. 그렇게 신과 만난다!

늘 혼자가 됨으로써, 혼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음으로써!

 

 

장 뤽 고다르는 자신의 영화 ‘열정(Passion,1981)’에서

영화, 열정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속 제작자는 영화 속 감독에게 말한다.

“관객은 스토리를 원한다!”

그러나 영화 속 감독은 단호하다.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스토리는 이미 끝났다!”

관객들은 아직도 스토리를 원할지 모른다.

소설을 읽을 때처럼 정당한 내러티브를 구할 수도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간의 오랜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라도 영혼의 울림을 원한다.

너무도 강렬해서 눈 감아도 자꾸 떠오르는 영상.

며칠째 잠을 설칠 만큼 오래도록 남아 있는 여운

어딘가에 꼭 살아 있을 것만 같은 우리의 주인공.

결국 “너도 나와 같구나!” 가슴을 치는 그 무엇!

나는 영화의 내용이 아닌 '영화'에 관심이 많다.

잡다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

그것이 한 인간이라면 그 사람의 히스토리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꿰뚫는 결정적 이미지!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를 빌리기 보단

영화란 무엇인가,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토크쇼 사회자는 찌질하게

과거사나 캐묻는 따위의 짓은 삼가야 할 것이다.

물론 그에 맞춰 변명이나 늘어놓는 게스트도 마찬가지!



내가 만약 대종상이든, 칸이든 영화제에서 수상소감을 말해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그 첫마디를 꺼낼 것인가?

“...영화는 꿈이죠?... ”

우아하게 웃고 난 뒤 이렇게 운을 떼지는 않았을까?

의문문처럼 끝을 살짝 높여 말하겠지만,

사실은 나의 시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에 겪었던 일이나 단지 추억이 아니라 영화 자체,

혹은 삶 그 자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말하는 것!

결국 우리는 7천원이라는 돈을 주고 한 시간 반

혹은 두 시간 동안의  '꿈'을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타인의 꿈에 잠시 초대된 우리는 스크린 앞에 앉으며

과연 어떤 꿈일까. 모종의 기대에 부푸는 것이 아닐까.

삶이라는 꿈속에서 우리는 다시 또 꿈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결국 꿈속에서도 꿈이 필요한 존재이다.

꿈을 파는 이는 그러므로 아주 멋진 꿈을 꾸어야만 한다.

그 인생, 통째로 멋진 꿈이 되어야만 한다!

 

 

많은 드라마나 동화들이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끝을 맺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들의 한 순간이 얼마나 찬란했던가를 기억한다.

흔쾌히 자신의 생을 걸었던 그 찬란한 순간 말이다.

고흐나 소로우를 불행했더라고 말하는 자는

자신의 생을 그 어디에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자다. 

권정생과 천상병을 가난했다고 말하는 자라면

그 영혼은 또 얼마나 가난할 것인가!

연인들은 날마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 결혼을 한다지만

그들은 그 순간부터 다시는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단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행복한 결혼을 꿈꾸지만

함께 하는 그 순간부터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해야만 하는 것.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딜을 감행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까?

가족을 얻는 대신 찬란한 만남을 내어주는 거래!

가족이 있는 자의 고독이야 말로 참으로 가난할 터이다. 



내 영화에서 ‘사랑’은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텅 빈 세상 속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그 인간은 ‘가득 찬 이’어서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노는듯 일하는 듯 다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가만 보면 그는 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세계를 하나의 일관된 모습으로 바꾸고 있는 것!

차츰 그 빛깔과 모양을 달리하는 그의 세계.

마침내 찬란하고 장대한 세계가 스크린 가득 펼쳐지고

카메라, T.B.(track-back) 하면 그의 세계는 더욱 거대해진다.

성을 짓듯 자신의 삶을 짓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영상으로 실현된 자못 성스럽기까지 한, 한 인간의 세계!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그 장면을...



그는 가슴 가득 ‘삶’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가만히 있어도 매순간 빛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

우리의 주인공에겐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이벤트도 필요없다.

그는 삶을 온통 ‘삶’으로 가득 채웠던 사람이며.

자신에게 골몰함으로서 타인을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다른 준비라면 가슴이 휑한 자의 몫일 터,

우리는 오로지 진정한 자신만을 가지고 만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 신에 대한 센스다.

그렇다면 만나는 그 순간 우리 훨훨 타오를 수 있다.

동시에 다 타고 그저 하얀 재가 될 수 있다.

아니, 흔적도 이름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

그저 투명해질 수 있다!

죽어 저승에서 다시 만난 사람처럼, 아니

수 억 겁 세월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다만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는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5:34

중국 은나라는 갑골문자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낱 전설상의 가공 국가일 뿐이었다.
기원전 2600년경 영원한 삶을 찾아 길을 떠난 메소포타미아의 왕 길가메시도
역시 우룩의 유적과 무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저 최초의 문학 혹은 신화 속 주인공에 불과했다.
또한 당나라 때 진리를 구해 17년간 서역 110여 개국을 섭렵한 현장은
 <서유기>혹은 <날아라, 슈퍼보드>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삶과 드라마와 신화는 둘이 아니다.
꿈과 전설과 일상 또한 둘이 아니다.
삶은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는 신화가 된다.
일상은 꿈이 되고 꿈은 전설이 된다.


강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이는 것!
그 물줄기 하나하나가 모여 큰 바다가 된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는 것!
지금 이 순간순간이 모여 하나의 생(生)이 된다.


나는 훗날을 위하여 돈을 저축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부지런히 저축하고 있다.

연금이나 보험으로 미래를 대비하지는 않지만
내 삶을 기록함으로써 순간순간을 보상받고 있다.
노후를 위한 대책 따윈 없지만 죽음,
혹은 생의 마지막에 대한 비전은 있다.
어린 왕자처럼 커다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친구의 마음에 오롯한 추억 하나 새길 순 있을 터이다.


나에게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을 저축하는 일!
단 한 사람, 나를 증언하고 기억할 이에게 나의 순간을 저축한다.
또 후세의 인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나는 순간순간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이다.
나는 어마어마한 부자이므로 쉽사리 파산하거나
적금을 해약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나의 유일한 놀이는 생에 관한,
당장은 읽히지 못할 글을 쓰는 일.
달콤하고도 쌉쌀한, 깊은 풍미가 있는 나의 사명!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나는
그 어떤 일에서도 내 영감의 포도주만큼 근사한 맛을 느껴본 적이 없다.


책을 내는 일이란, 더구나 인간 존재와 삶에 관한 탐구란
인류공동의 작업이며 공동의 자산이 아니었던가!
나는 자주 칩거를 일삼지만 사실 누구보다 사람들과 만나기를 좋아한다.

후세의 인간과도 나는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죽음에의 유혹을 이겨내며 날마다 글을 쓰는 이유이다.
나는 깊고 깊은, 그리고 영원한 만남을 준비한다.

내게 삶은 꿈, 삶은 봄, 아니면 여름 한낮의 짧은 꿈!


내 앞엔 광활한 신대륙이 펼쳐져 있다.
그 곳이 광야를 그리워하는 진정한 나의 무대.
늘 거친 황야를 달려야만 편안해지는 나의 영혼이여!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 선배들이 닦아놓은 터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단 한 번도 주류에 편승하기를 원했던 적이 없다.
나는 어쩌면 이 세계에 육체를 빚진 사람.
하루 속히 완전한 나의 우주, 나의 고향으로 날아가고 싶을 뿐.
나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5:30

 

내 영화에서 만남이나 사랑을 연상시키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주인공들은 서로 말도 걸지 않으며 잘 만나지도 않는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도 그들이 충동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완벽한 인물이기도 하려니와

완전한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드문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오로지 꿈이나 환상으로만 그려진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도 환상으로 처리되긴 마찬가지다.

사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오히려 사랑 그 자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내겐 관객에게 모종의 기대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다.

완전한 사랑은 일상에서도 가능하리라는 아주 위험한 기대!

함부로 만나고 사랑해도 사랑은 다 아름다울 거란 헛된 기대!

그러나 여타 작가들과 달리 나는 주인공을 죽이지는 않는다.

내가 주인공들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완전한 사랑은

추억, 혹은 기억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걸핏하면 주인공을 죽이는 방법을 쓰곤 하지만

그 방법은 오히려 현실에서 더 먹히는 방법임을 나는 알고 있다.

영화<사랑한다면 그들처럼>의 주인공처럼 절정의 순간에,

사랑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죽는 건 어찌보면 허무하도록 간단한 일!

그렇게 살아남은 자가, 죽은 이를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거기까지가 다다! '죽은 이' 그 이상으로  기억되는 데엔 역시 무리가 있다.

 

최진실의 신파 <편지>가 표절했을 법한 오래된 프랑스 영화에서도

그런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갈구는 인상 깊게 그려지고 있다.

사랑을 되살리려는 남편의 거의 발악이라고 해야 할 노력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 때까지 무모하게도 계속 되고 있다.

아내에게 익명의 러브레터와 꽃을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 러브레터의 주인공이 되어 낯선 호텔로 유인하기도 하며

때로는 술에 취해 스와핑에 가까운 짓을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주위 사람은 물론 아내에게도 냉대를 받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남편의 노력은 아주 진지하게 오랫동안 준비된다.

<편지>의 마지막처럼 울고 짜는 찌질한 장면은 아니지만

웬만한 영화, 비디오 장면의 원조일 법한 비디오 신(S#)이 있다.

하지만 죽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살아서 완전하기 보다는!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사랑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죽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라고 두 번쯤 말해도 흉이 안 될 정도로.

 


소나기의 소녀도 죽었고 김수현의 여주인공도 죽었지만

죽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최후의 방법이다!

그리고 나는 최후의 방법을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조금쯤 멋져 보이도록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실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또 다른 방법에 다름 아니다.

주인공(사실 상대역)은 죽는 거밖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죽는 것.

그러므로 주인공(상대역)을 죽이는 일은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하는 거다.

작가가 쓸데없이 주인공(상대역)을 죽일 때에는 그런 고백쯤 각오해야 하는 것.

그렇다면 죽지 못한 우리의 주인공(상대역)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당연히 죽음에 버금가는 강한 임팩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죽음보다 감미롭고, 죽음보다 화끈하고, 죽음보다 강렬하고

때로는 죽음보다 더 처절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우리의 주인공(상대역)을 기억해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나의 히로인에게 되도록 완전하기를 요구하곤 하지만.

그는 이미 내 요구 이전에 스스로에게 잔인하리만치 철저하다.

눈빛 하나, 표정 하나, 말투 하나까지도 고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내가 아주 완전하다고 믿는 장면조차도 만족해하지 않는다.

가슴 속 열정은 식은 지 오래고 그저 테크닉만 남은 추한 배우의 모습.

그는 그렇게 설렘이 사라진 그저 능숙한 자가 될까 스스로 경계한다.

하지만 나는 염려하지 않는다. 내가 염려하는 것을 들켜서도 안 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신도 자신을 아주 잘 아는 이와 만날 땐 가슴 설렐 것이다!

그저 일상이 아닌, 어쩌다가 한 번 그토록 그리던 이를 만날 땐

신도 가슴 두근거릴 것이며, 때론 웃지 못 할 실수도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해도, 아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에

오히려 그 찬란하고도 장대한 순간을 자못 가슴 떨려 할 것이다.

나의 히로인이 그런 고뇌들로 밤잠을 설치는 것은 사실 고무적인 일이다.

그는 결코 어느 한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스타일이 못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일상이 아니다. 사랑은 꿈이다! 방금 깨어난 꿈속에서처럼

뭉게뭉게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 사랑은 피어나고 충만해야 한다.

어제 일을 되돌아 봐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가지 않아야 한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웃고 떠들던 그 사람도 그저 꿈속의 존재여야 한다.

언제라도 말 걸 수 있고 언제라도 대면할 수 있다 해도 사실

언제라도 말 걸 수 있고 언제라도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최후의 방법을 아직 쓰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상이 아니다. 사랑은 꿈이다! 주말이나 일요일 한 낮

소파에 널브러진 가부장처럼 지루하고 한심한 그림이 아니어야 한다.

첫 키스처럼 날카롭게, 섬광처럼 번쩍이며 스쳐지나가야 한다.

무인도에서 마침내 발견한 과일처럼, 까마득히 멀리 지나치는 유람선처럼

서로에겐 아주 잠깐 꿈속에서나 본 듯한 아쉽고도 아쉬운 존재여야 한다.

흡사 소년이 소녀와 헤어질 때의 그런 눈빛으로 서로는 존재해야 한다.

그런 완전한 느낌을 최후의 방법을 쓰지 않고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전략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고, 조바심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채로,

마음껏 자신을 펼치면서도 자유자재로 그 기분을 누리면서도

그 첫 키스 같고, 섬광 같고, 꿈속 같은 것을 오랫동안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마침내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그 모종의 모드를, 미치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기꺼이 유지할 수 있다면 시인은 절필할 이유가 없고

화가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제 머리를 쥐어뜯을 일이 없다.

음악가는 미친 듯이 불후의 명곡을 작곡할 것이며 후세의 추종자들은

그의 연인의 이름과 사연을 밝혀내느라 오두방정을 떨어댈 것이다.

어른도 아이처럼 맑고 투명할 것이며 남자도 여자처럼 예민할 것이다.

아이도 어른처럼 기다릴 줄 알 것이며 여자도 남자처럼 멋질 것이다.

그럴 때 자식을 낳지 않고도 세상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다!

그럴 때 부모를 의식하지 않고도 신과 가장 가까이 지낼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을 때야 있을까마는 설사 그때가 온다 해도

내 영화에선 최후의 방법에 대해 미리 결정해 두지 않을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는

그런 평범하고도 할 일 없는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내 영화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호들갑 떠는 인사나

상대에 대해 익히 잘 안다는 듯한 표정을 가진 인간은 물론.

아주 능수능란한 말솜씨와 의기양양한 표정을 가진 배우도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조차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세치 혀로는 온갖 사치스럽고 달콤한 말들을 주워섬기지만

그 표정과 걸음걸이는 이미 늙어 버렸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설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 같은 표정, 풀려버린 눈동자,

한심한 담배연기 따위는 50m앞 자동차 안의 거울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가끔은 뱃속까지 들여다보는 내 섬뜩한 눈빛에 스스로도 괴로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겁도 없이, 준비도 없이 오디션을 보러오는 초보를 보면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 해도 눈 마주치기조차 싫을 때가 많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은 이미 차를 몰고 저 멀리 사라져 버리는 것!

나는 오래 살 것이지만 단 한 순간도 허망하게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영화의 한 순간은 영원보다도 길고 영원은 섬광처럼이나 짧기 때문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그 여자 모욕하기

그 여자 모욕하기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5:24

그 여자 모욕하기


나의 히로인을 모욕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주면 된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신경써주는 일 따위!

가령, 아마추어 권투시합에 나가게 된 그에게

“그 선수가 너보다 세던데...”라며 걱정해주면 될 것이다.


또한 적당히, 어느 정도만 믿어주면 된다.

결코 완전하게 신뢰하여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면 안 된다.

독립적인 인격체지만 그래도 일단은 연약한 여자로 대해주기.

일반적인 여성들의 특성을 잘 캐취하여 그에게 적용하거나

“여자가...!” 정도의 말투라면 썩 훌륭할 것이다.


여자는 예쁜 게 최고, 예쁘다고 말해주면 된다.

귀여워해주거나 어린 아이처럼 대해주면 더더욱 좋다.

마음을 테스트하고 확인하는 일도 빠뜨리면 안 된다.

세심하게 물어보고 하나하나 챙겨주고 자상하게 말해주고

이래라 저래라 조언까지 해준다면 정말 퍼펙트하다!


가끔은 그를 아주 잘 안다는 듯이 행동하라!

서슴없이 다가가고 속속들이 친한 척하라!

여자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고 그가 여자임을 절절히 느끼게 하라!

때로는 그 사람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말라!

보호하고, 양보하고, 지켜주고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하게 그를 모욕하는 길이다!

또한 그에게 완전하게 신뢰를 잃는 길이기도 하다.

천생여자, 여자다운(?) 여자, 여자 빼곤 아무것도 없는 여자,

순수하고 무결한 여자의 결정체,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

나는 그런 여자가 마초보다 무섭다!


‘여자’에 갇혀 그 세계가 완전하다고 믿는 또 하나의 족속!

마초는 유혹될 수 있지만 그런 족속은 유혹조차 불가능하다.

그들의 세상은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안에 ‘여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 안에서 행복하다.


존 그레이라는 사람은 말한다.

남자는 신뢰받길 원하고 여자는 관심받길 원한다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영역에 개입해 올 때 모욕을 느끼고

여자는 같은 경우에,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그렇다면 나의 히로인은 남자다.


가령, 배우자나 연인이 내일 아침 출장 가는 비행기에 대해

“내일 몇 시 비행기예요? 늦지 않도록 하세요.”

라고 한다면 남자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끼고

여자는 자상하게 챙겨주는 것에 관심 받는다고 느낀다며!

물론 통계적으로는 엇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다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놓친 사람에게 또,

“거봐요, 내가 비행기 놓친다고 했지요? 그러게 좀 일찍 자라니까...”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건, 여자건, 부모건, 친구건 간에

그에겐 아주 피곤한 스타일로 치부될 것이다.

하여간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의 영화에 여자는 없다!


‘여자라서 행복한’ 여자, 사랑받는 여자, 쭉쭉빵빵한 여자도 없고

내숭 떠는 여자, 징징대는 여자, 바가지 긁는 여자,  ‘yes'를 'no'로 말하는 여자도 없다.

남편 있고 자식 있는 여자, 현모양처인 여자, 현모양처가 꿈인 여자는 물론

명품 백 하나 못 사주는 남편이라 죄책감 가지게 하는 여자 따위는 없다.

오로지 사랑, 그 자체인 여자가 있을 뿐!

 

세상 그 많은 인간 중에, 그 중에 인간 여자 하나 만나지 못할까마는.

오늘도 나는 믿기로 한다.

세상에 여자인 인간은 있어도 여자라는 인간은 없음을...

'여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들 '여자'에게서 '여자'를 빼고 나면 실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어쩌면 재미없는 이야기

어쩌면 재미없는 이야기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4:56

어쩌면 재미없는 이야기

 

 

신라 향가 처용가를 보면 등장인물이 세 명 나온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들은 처용과 아내, 그리고 역신이다.

그러나 그들 중 둘만이 인간이고 나머지는 그렇지가 못하다.

역신은 물론 사귀(邪鬼)이고, 처용은 일단 동해 용왕의 아들!

그러면 이들 중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어쨌든 전해 내려오는 처용가로는 처용과 역신은 인간이다.

처용가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인 아내는 내보기엔 영 아니올시다!

아내라는 인물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저 처용의 것이었다가 역신에게 빼앗긴 물건정도로 나올 뿐.

뒷얘기로도 아내의 의지나 판단이나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외간남자와 정사를 벌인 아내라면 그 어떤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내는 남편인 처용과의 관계, 자신을 흠모한 역신과의 관계.

등장인물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주인공이다.

팜므파탈이 되어도 모자랄 여인이 그 존재조차 미미하고

오히려 그 어떤 관계에서도 인간이 되는데 실패하고 있다.

관계 맺을 필요 없는 처용과 역신이 관계를 맺는 아이러니라니.

아니, 처용과 역신의 관계를 위한 포석 정도인 아내의 존재감이라니!

용의 아들이나 요사스런 귀신은 인간이 될 수 있으나

정작 인간인 아내는 가구나 그림자나 물건이나 개나 소나 마찬가지.

하여간 처용가에는 이래저래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허무한 진실이 있다.


그 환영 같은 아내에게는 웅녀가 먹었던 쑥과 마늘을 선물해 주기로 하고

어쨌거나 처용에게로 포커스를 맞추면, 그가 AB형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만약 당신이 처용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A형 방식으로 소심하게 밤새 애꿎은 문고리만 잡고 벌을 설 것인가,

아니면 B형 역할처럼 첫날밤 신방 들여다보듯 훔쳐보며 즐길 것인가,

아니면 O형 모양새대로 이판사판 결판을 낼 것인가!

하여간 우리 역사 속의 처용은 뭘 좀 아는 양반이긴 하다.

내가 처용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적어도 그 장소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지금쯤 어디 가서 술 한 잔 걸치며 허허 웃고 있겠지!

비장의 카드를 가졌으니 야릇하고도 허허로운 웃음을 웃으리라.

물론 비장의 카드란 말 그대로 숨겨진 카드, 비밀의 카드다.

세상에 고수는 존재하고, 그의 아내가 그런 절대고수이지 말란 법은 없다

알아도 모르는 척, 속 깊은 그릇이 되어야지 드러내면 유치해진다.

만약 처용이 자신의 카드에 대해 섣불리 고수 아내에게 들킨다면?

주도권을 쥔답시고 자신의 카드를 슬쩍 보여주는 우를 범한다면?*

자신의 카드소멸과 동시에 아내에게 더 큰 카드를 내밀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여간 이건 결혼 생활의 지속 여부나 사랑과는 관계없는 얘기다.

그런 시추에이션에서 그 카드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고수아내의 방법은?

당연히 있다. 물론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아는 문제!

무조건 머리 굴린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게 되었다고 아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며, 설사 이론을 가지고 있다 치더라도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 라는 것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실은 매 순간 순간이 바로 '그 때'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자기 세계가 확고해야 하고 다른 세계와 당당히 교류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

하여간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그 보다 더 상위의 카드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 카드를 가져 주도권을 쥘 수 있는가가 문제로 될 뿐!

자칭 깨달았다, 말 많은 사람도 사실 하는 짓을 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비장의 카드가 있는지 없는지, 주도권이 뭔지 알고는 있는지,

아니면 주도권도 없으면서 천지분간 못하고 입만 살았는지 말이다.

병법이 별건가? 이기면 되는 거다. 하지만 싸우려고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이길 수밖에 없도록 자신의 세계를 미리 완벽하게 셋팅해 놓아야 하는 것!

그러면 져도 이기고, 이겨도 이기고, 싸워도 이기고, 안 싸워도 이긴다.


마지막으로 역신에게도 애정을 좀 나눠주자면, 그는 좀 매력 없는 조연이다.

혹자는 관대한 혹은 초탈한 처용에게 감복하여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였다지만

내 영화에서라면 그리 길이길이 남을 굴욕적인 선택은 하지 않는다.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여 사랑을 나눴다면 그건 아내와 역신만의 문제!

아내가 처용의 소유물도 아니고 어찌 처용에게 사죄하는 초딩짓을 하는가.

하여간 어설픈 마초들이 어설프게 의리 따지고 남자랍시고 떠세다.

내 시나리오에서라면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철딱서니 마초는 없다.

웃기지도 않는 남자대 남자의 대화나 결투 따위도 없다.

아내는 섹시한 이름을 가진 당당한 팜므파탈로 거듭날 테고

역신은 사랑에 목숨 거는 우직하고도 말없는 사내로

처용은 신선이 되어 날아갈 듯한 미모의 풍류남아로 그렸을 것이다.

바람피우고도 당당한 팜므파탈 아내를 변함없이 대했을 것이며

역신의 존재를 알고도 모르는 척, 묵인 아닌 묵인을 했을 것이다.

역신 역시 그리 쉽게 아내를 떠날리 없는 우직한 사내.

급기야 음흉한 처용의 속내를 눈치 챈 뻔뻔한 아내는

그야말로 뻔뻔하게도 세 사람의 여행 내지 동거를 제안했을 수도 있다.

역신이라면 잠시 괴로워하지만 나름대로 룰을 정하려고 했을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처용이라면 뭐든 허용하되 스스로는 거기에 매이지 않을 것 같다.

마치 그림처럼, 유령처럼 그렇게 담백하게 투명하게 존재할 것만 같다.

하여간 각각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므로 이야기는 점점 더

점입가경, 형편 무인지경이 될 것이다.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세 사람 다 그대로 물러설 위인들이 아니란 것쯤 당신도 이미 눈치채지 않았나?

처용은 시종일관 고고하고 푸근한 승자의 모습으로 존재 하며,

아내 또한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전히 웃고 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승자일까? 그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의 몫일 거다.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또 그것이 반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승자, 패자를 떠나 마지막엔 관객들도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물론 어이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관객도 있겠지만!

반면 역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아마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세 사람 중 누가 신선이 되어 날아가든, 시종일관 미소를 짓든

깨달음을 얻든 간에 그것은 그들의 삼각관계와는 상관없는 문제!

그들은 각자 홀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섹시한 아내는 더욱 우아한 미소로 처용을 바라볼 것이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우직한 멋쟁이 역신과 풍류남아 처용은

가끔씩 얼굴을 보는 진정한 친구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남자대 남자의 결투를 통해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다 벗고 만났으니

또한 남자 대 여자로서만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만났으니

세 사람이 지금까지 함께 만나며 재미나게 웃고 떠들지 누가 알겠는가?

하여간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몫의 이야기를 완성해야 하는 것!

작가도 따로 없고 감독도, 배우도 따로 없다.

다만 삶은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는 신화가 될 뿐. - 신비(妙)


 

 

*

-물론 여기서 하수아내는 논외다. 하수는 그냥 발발 떨며 알아서 기겠지!

-또한 웬만한 여자라면 그 카드 슬쩍 내밀지 않아도 자신의 위기를 직감할 수 있다.

Posted by 신비(妙)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3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3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4:45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3



만약 내 글을 읽어 줄 단 한 사람의 독자도 없다면
그때에도 계속 글을 쓸 것인가?
이런 가정이 있을 수 있겠다.
내 대답은 간단하게도 ‘Yes' 다.
물론 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는 그 생각들을 기록하지 못해
놓쳐 버리면 안 되기 때문!
당연히 글을 읽을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인간을 상대하진 않는다.
적어도 신만은 나를 알아볼 것이란 생각이 있다.
혹시라도 있을, 그 신과 같은 시선의,
미지의 누군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있다.
100년 뒤, 200년 뒤, 300년 뒤 아니, 나는 영원을 생각한다.
미래에도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나
종교학자, 명상가, 예술가들은 있을 것이란 생각.
그것을 또한 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런 생각이 지금 이 순간 온몸의 세포를 깨어나게 한다.
설핏 스치는 생각의 줄기를 잡아채 그 뿌리를 캐어내는 것,
그 뿌리내렸던 땅과 그를 살찌게 했던 햇살까지
모두 어우러져 한바탕 꿈이 되는 것.
그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면
나의 시나리오에선 매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시나리오를 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축이다.
관객을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매력!
질컥거리고 끈적거려서는 그들의 마음을 끌 수 없다.
핑계대고 변명하고 지질거리면 도망간다.
관객은 연약하다. 달라붙어 못살게 굴면 질식사 한다
또한 냉정해서 어설픈 구애로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이다. 신을 유혹할 마음가짐이 아니면 실패다.
관객을 모독할 작정이 아니라면 쿨해야 한다.
가장 쿨한 것이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나의 히로인은 다른 인간에 일체 관심이 없는 대신
인간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연애에 관심이 없는 대신, 사랑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누군가의 기쁨이나 고통대신 그의 천재에 관심이 있고
프로필 대신 그의 정신에 관심이 있다.
열등감은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장대하게 키워야 할 것.
열등감을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는 페어 플레이어fair player다.
그러므로 져도 진 것이 아니다.
매순간 새로 시작하므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이 독립되어 있다.
당연히 변명할 필요도 없다.
뭣 하러 인간을 상대로 긴 말 하겠는가?
바로 신과 담판 지으면 되는데.
전쟁에 이기려면 적의 왕을 끌어내려야 하고
회사를 접수하려면 주주총회를 장악해야 하는 법.
결코 일개 병사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말단 사원에 힘 빼지 않는다.
또한 함부로 친한 척 하지도 않는다.
친구라는 이유로 그의 집에 쳐들어가지 않으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방에 쳐들어가지 않는다.
가족이니까 허용되고 친구니까 봐주고 그런 거 없다.
오래 사귀었다고 더 친하고 처음 봤다고 내숭 떨고 그런 거 없다.
그에게 정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로봇이 인간되길 기다리는 게 낫다.
그는 오로지 자기 삶의 원작자이다.
오늘도 어둠 속에서 홀로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
그를 알아주는 이 없다 해도 슬퍼하는 일 따윈 없다.
그에겐 비장의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은 자식 같은 마속을 참하며 울었다던가.
나의 히로인은 거치적거린다면
제 손으로 제 심장이라도 꺼낼 위인이다.
그저 신의 눈높이로 자신의 영화를 바라볼 뿐!
가끔 너절한 장면을 부탁하는 관객도 있지만
그건 나의 히로인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찍는 실수를 범한다면
차라리 제 영화 속으로 뛰어 드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무심히 주인공 옆을 스쳐 지나는
어느 경찰관의 총이라도 빼앗아들고 뒷골목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또 태연하게 앉아 ‘액션!’을 외칠 것이다.
너절한 장면은 매력 없는 인물이 만드는 것.
물론 매력 없는 인물도 엄연한 안타고니스트로서
주인공을 부각시킬 역할을 부여받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악역이나 조연이나 단역조차도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크든 작든 각자 자기별의 대표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험한 숲길이나 산길을 가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는 그 장면을 하늘 높이에서 부감으로 잡는다.
영화 얼라이브(alive, 1993)에서 생존자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 환희에 차고 어쩌면 거룩하기까지 한 부감촬영 말이다.
각 부감 샷은 저마다에 어울리는 촬영기법이 있다.
반가운 친구끼리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일 때는
각자의 개성이 잘 묻어나도록 각각의 포즈를 살려 찍어야 한다.
그리운 친구를 만났을 때는 가까운 높이에서
미세한 표정이 그대로 살아나도록 찍고
감정이 배제된 군중 속 주인공의 우아한 미소는
부감 외에도 주위의 배경과 군중의 표정도 슬로우로 잡아 주어야 한다.
그런 장면에 필수적인 것은 분위기를 고조시켜줄 배경음악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나탈리 머천으로 시작되는
어느 멋진 날 ost가 필요하다.
하늘거리는 흰색 커튼과 그 사이로 비춰드는 햇살이
꿈결로부터 아침으로 한결 자연스럽게 건너오게 해준다.
나른한 여름 오후에는 청량한 조지 윈스턴이나
쿨한 제리 라퍼티Gerry Rafferty.
좋은 친구 만나 술 한 잔할 때는 이문세 5집
혼자 운전할 때는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In dreams.
비 오는 오후에는 리 오스카Lee Oskar의 하모니카 연주.
커피 향 짙은 재즈카페에서는 게리무어Gary Moore의 초강력 감성에너지.
아무 생각 없이 고개 끄떡이며 음악을 즐기고 싶을 땐 신예, 빅뱅도 좋다.
생의 매 순간 영화를 볼 수는 없지만 생의 매순간 영화를 만들 수는 있다.
단 한 순간의 장대한 영화, 단 한 편의 짧은 영화를!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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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4:41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

태공망 강상은 제나라 왕으로 고향땅에 돌아갔을 때

다시 만난 아내에게 물 한 그릇을 엎질러 보였다.

궁상떨던 백수시절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간 아내에게

냉정하게도 손수 엔트로피의 법칙을 보여 주었던 것!

과연 그의 아내는 이제와 다시 둘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까.

어차피 세상사 되돌릴 수 없다!

나의 히로인이라면 제아무리 왕이 되었다지만

예전에 제가 버린 인간에겐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가 왕이 아니라 천자나 신이 되었다 해도

아내에겐 여전히 자신이 버린 하찮은 인간일 뿐!

물론 여기서 강상이 훌륭한 인격자라거나

아내가 형편없는 속물이었을 가능성 따위는 배제한다.

두 사람 다 그저 자신의 세계를 가진 독립적인 인격체일 뿐

선과 악의 캐릭터를 부여하면 수준 떨어진다.

나는 옳고 그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외부적인 조건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면

나의 히로인이 될 자격이 없다!

필름은 되돌릴 수 있지만 드라마는 되돌릴 수 없는 법.

나의 시나리오에 그런 너절한 장면은 필요 없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새삼스레 놀라거나

화내거나 설레발칠 일이 없는, 그는 신이기 때문이다!

구걸은 거지나 하고 충격은 바보나 받는 것.

혹자는 냉정하게 자신을 차버린 연인 앞에

멋지게 변신해서 다시 나타나는 꿈을 꾼다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변신 좀 했다고 사람 달리 대접할 인간이었다면

뭐하러 그리 공을 들여 상처를 받을까!

그럴 땐 그저 다 잊고 새출발하는 게 좋다.

호탕하게 한 번 웃어주고 떠나는 거다.

서부 영화의 주인공처럼 폼나게, 뒤돌아보지도 말고!

물론 혼자 웃고 혼자 떠나야지,

떠나는 뒷모습 보여주려 안달하면 코미디된다.

 

내 시나리오에는 대화가 없다!

등장인물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

상대의 말에 토 달거나 끼어들지 않는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서 보이는 만큼만 이야기하며

타인의 세계에 대한 침범은 일체 없다.

따라서 갈등도 없고 드라마도 없다!

각자 확고한 자신의 세계가 있을 뿐.

같은 장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그들은 각자 자기 세계에 존재한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안에 드라마(?)가 없음으로써,

타인의 삶에 일체 개입하지 않게 됨으로써

갈등은 줄어들지만 쾌감은 그에 비례해 늘어난다.

보통의 인간들이 독점해야 할 것은 공유하고

나누어야 미덕인 것은 홀로 묵묵히 감당하며

놀라야 할 것에 태연하고 화내야할 대목에 미소를 날린다.

가족도, 애완동물도, 정도, 피도, 눈물도 없는 영화,

기존의 통념과 인습을 모조리 해체해 버리는 영화

편견과 선입견을 통쾌하게 깨부수는 그런 영화이다.

 

나는 강상의 아내가 그의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여긴다.

아니, 자신이 오히려 물 한바가지 엎었어야 했다.

강상이 알은 체를 하고 잘난 체를 했다 하더라도

그저 시니컬한 미소 한 방 날리며 돌아섰어야 했다.

그리하여 기가 차고 오기가 난 강상이

오히려 애가 달아 말 한 번 더 붙였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역시 내마누라답다, 너털웃음 한 번 웃어야

그림 좀 나와 주는 거다!

그럴 때 어떤 관객은 재미를 못 느낄지 모르겠다.

늙그막에 밥벌이 못한다고 인격자 남편을 차버렸던 속물여인이

왕이 되어 귀환한 그에게 철저히 다시 버려져야

비로소 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갈등 대신 한 바탕 너털웃음이 있을 때,

도덕이나 윤리 대신 예리한 직관이 있을때 짜릿한 쾌감을 얻는다.

인간의 심연을 꿰뚫고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이 알알이 박혀있는 보석같은 영화 말이다.

그 대목에서 이혼 하지 말라는 교훈 어쩌고,

진정한 사랑 저쩌고 하는 인간과는 말 섞지 않는다.

눈앞에서 대놓고 칭찬하고 치켜세우는 그런 거 없다.

뒤꽁무니에서 눈치보고 흉보고 그런 거 없다.

낯간지러운 고백이나 사랑의 밀어 따위도 없다.

노인 등장한다고 효도나 노후대책 얘기해도 안 된다.

여자 나온다고 사랑이나 다이아반지 운운하면 끝이다.

노골적인 섹스신에 애절한 사랑 운운 점잖은 체, 잘난 체해도 웃긴다.

질컥거리는 영화, 스토킹 영화는 애초에 사절이다.

하여간 말 많으면 수준 떨어진다!

 

설명도 해명도 변명도 다 필요 없다.

시시콜콜 이러쿵저러쿵 중간 얘기는 다 헛소리다.

나의 히로인은 원작자겸 감독!

남의 말에 토 다는 표절자를 가장 우습게 여기며

남의 행동에 개입하는 침입자를 가장 역겨워한다.

또한 섣불리 타인의 고통에 알은 체하는 오지랖이나

자신이 질식사 시킨 주검을 앞에 놓고도 모르는 당달봉사는 캐스팅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미스캐스팅이 있었다면

애초에 캐스팅을 한 그 시점을 바라볼 뿐,

갈등하고 논쟁하고 바로잡고 그런 거 없다!

캐스팅을 잘못한 자기 자신을 향해

식은 미소 한 번 날리며 떠나는 것이 원작자의 방식!

나의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나의 히로인은 신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나이가 어디 있는가?

그의 어머니는 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대지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신비(妙)어록2-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신비(妙)어록2-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4:26



 



모르는 이와 가끔 유쾌하게 대화를 한다.

나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

사실 그 사람들이 나의 피붙이와 다른 점을 모르겠다.

적어도 그들은 나와 아주 쿨한 관계이다.

내게 시간, 혹은 관계와 애정은 비례하지 않는다.

내게는 아주 오랫동안 사귀어 온 남(他人)도 있고,

몇 번 만나지 않은 지기(知己)도 있다.

더욱이 연중행사쯤으로 대면하는 연인(?)도 있고,

이상하게도 자주 마주치는 원수(?)도 있다.

또한 스승 같은 제자, 제자 같은 스승,

가족 같은 남, 남 같은 가족도 있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가장 쿨하게 지낸다.

나의 호오는 간단하다. 쿨한가, 아닌가!

입속의 혀 같은 이는 우선 탈락이다.

말꼬리를 가로채는 이는 피곤해서 인사도 건넬 수 없다.

사사건건 남의 말에 끼어들고 남의 행동에 개입하는 이에게는

어린왕자의 형벌이 필요할 뿐이다.

연속극 드라마가 싫은 이유도

타인의 영역에 침범함으로서 갈등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친구가 있다.

좋은 친구는 결코 영역 침범으로 얻을 수 없는 법.

가슴 설레지만 편한 이가 있고 만만하지만 피곤한 이가 있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혼동하면 재미있다!

혼동하면 재미있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3:59

혼동하면 재미있다!



가끔 시나리오를 쓸 때가 있다.

주인공은 물론 여자다.

나의 페르소나이며, 동시에 신(神)이어야 하니까.

그 여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놀라거나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주인공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그는 여전히 영화 속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관객에게 줘야 할 힌트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자막이 올라갈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타나

여태까지의 이야기가 담긴 USB메모리를 귀걸이처럼 귀에 걸고는

보일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 주인공의 특징은 표정이 별로 없다는 것!

나는 영화 속, 혹은 드라마 속 연기자들의

변화무쌍한 표정연기에 별로 공감하지 못한다.

놀라고 당황하고 절망하는 그 오버된 표정!

나는 그렇게 극적인 순간에 그렇게나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이나 눈동자의 동요,

살짝 템포가 달라지는 눈 깜박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사실은 그런 것까지도 필요 없다.

그런 극적인 순간, 나에게선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고 하니까.

그래서 다들 반응을 강요하는 듯한 말과 표정을 되풀이하니까.

하긴 내 주인공은 눈 깜박임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뇌의 표정과 심장의 박동뿐이다.

잠시 스치는 생각에 터질 듯 쿵쾅거리는 가슴!

그런 급격한 변화는 오히려 극적인 순간보다

이를테면 반가운 친구를 만나기 전에 일어난다.

만나기 하루 전, 혹은 열 시간 전, 어쩌면 한 시간 전에!

그럴 때 내 주인공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히로인은 심장병 환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표정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나는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영화를 좋아한다.

환상과 실제가 함께 뛰어놀아 어느 것이 실제인지

어느 것이 환상인지 전혀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너와 나의 구분이 불가능한 영화.

때론 현실도 우연과 시나리오의 구분이 힘들어진다.

너와 내가 섞여,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될 때

너는 나를 표현하고 나는 너를 연기할 때

일상은 드라마가 되고 환타지가 일상이 될 때

그때 나는 너를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닐까!

그때 너는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정이 깊은 사람이 오히려 철저하게 냉정해지는 법이다.

마음 여린 사람이 때로 더욱 독한 기운을 내뿜는 것이다.

실제와 환상을 혼동하면 재미있다!

꿈과 현실도, 실제와 환상도, 픽션과 넌픽션도 마음껏 혼동하라.

그 혼돈을 창조한 사람은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모든 것은 누군가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

함부로 걱정하고 함부로 웃고 화낼 수 있겠는가?

그러는 순간, 누군가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될 수 있다.

자신 없다면 아마, 이불 뒤집어쓰고 혼자 울고 웃는 게 좋을 것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함부로 다가오지 마라!

함부로 다가오지 마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3:51

함부로 다가오지 마라!


나는 사회적 자살자이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살은 아니다.

의도적 자폐증, 꿈과 시간의 지배자!

나는 완강하다.

교육과 제도, 법과 규칙, 조직과 집단, 통제와 권위,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에 대해!

나의 욕망은 신랄하다.

조심성 없는 이라면 함부로 다가오지 마라!

날카로운 내 꿈에 언제 베일지 모른다.

인간은 각자 다른 별에 살고 있다!



여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땅,

나의 시계들은 멈춰있다.

마치 시간이 흐르기라도 한다는 듯이 의기양양 째깍거리며

온 방을 잠식하도록 내버려 둘 줄 아는가?  

나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또한 나의 왕국과 신(神)의 사이에는 통로가 있다.

그곳은 광야를 그리워하는 나의 무대.

혼자일 때 더욱 활발하여

영혼은 늘 거친 황야를 달린다.



삼차원에 사는 사람에게

사차원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평면의 세상에선

입체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언어는 단어와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맥락으로만 백 퍼센트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세계를 뛰어넘는 수밖엔 없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 다리의 재료는 오로지 사랑.

그곳에서 두 다리를 각 세계에 튼실하게 딛고 있어줄,

거인이라도 필요하다.

나의 일은 세계와 세계의 사이에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나는 천재다!

나는 천재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2:37
나는 천재다!
 
나는 천재다!
내가 스스로 그렇게 결심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재로 내던져지는 것과
자신의 확고한 의지로 선택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전자는 매력이 없다!
또한 비운의 천재로 끝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사라질 확률도 높다.
반면 성공한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왕의 남자, 장생도 그렇고 슈렉도 그렇고 미녀는 괴로워, 제니도 그렇다.*
황진이도 스스로 기생이 되고 자유인이 되었고,
소서노도 스스로 주몽을 떠나고 백제를 건국했다.
가장 매력 없는 캐릭터가 버림받고 우는 여자,
전전긍긍 바람피우는 남자이다.
자신의 삶도 온전히 선택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끄들리고 찌질거리는 캐릭터.
핑계도 많고 투정도 많고 원망도 많아
늘 남을 가르치려들거나 괴롭히며 의존하는 캐릭터.
그런 주인공은 정말이지 사양이다.
나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내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기로 했다.
아주 스타일리쉬하게!
 
 

나에게는 꿈의 메뉴가 있다.
잠을 자면서 나는 그날의 꿈을 고른다.
오늘은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나볼까.
아니, 하늘을 날아다녀 볼까.
아니지, 우주를 실컷 여행하고 난 뒤 바로 친구의 집으로 낙하하면 되겠군!
그렇다!  나는 잠을 자도 의식이 잠들지 않는다.
잠을 자면서도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하고 명상을 하는 것이다.
불면증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내 머릿속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나는 나의 꿈을 선택하고 또한 지배한다.
깨어있는 그 어떤 시간도 물론이지만
꿈을 지배하지 못한 날은 그만 우울해지고 마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난 뒤엔 그 상쾌한 기분이 잠에서 깨고 나서도 오랫동안 유지된다.
친구를 만나거나 수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우주를 여행하고 온 날은 무척이나 피곤하다.
오랜 날들을 그러다보면 결국엔 피로가 쌓여
기절하듯 자게 되지만 나는 ‘꿈의 지배’를 멈출 의향이 없다.
나는 내 자신의 그 어떤 부분이라도 지배하지 못하면
정말로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싫다!
이것은 이름의 좋고 나쁨 이전의 문제다.
그야말로 이름이란 내 것이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의 최고봉 아닌가?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면 나는 절망할 것 같다.
아니, 아마도 그 입을 틀어막아 버릴지 모른다.
나는 신비(妙)다!
내가 직접 지은 이것은 ‘삶의 신비’, ‘삶 그 자체’, 또는 ‘전체’라는 뜻이 있다.
사실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그저 ‘신비(妙)’라고 불린 적이 있다.
물론 제 친구와 대화 중에 제가 읽은 책의 저자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우연히 그 장면을 본 나는 참으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에게, 존칭도 없는 신비(妙)라는 이름은
‘-씨’나 ‘-님’을 붙여야 할 ‘이름’이 아니라 이미 ‘브랜드’였다.
나는 그 어떤 역할과 지위, 이름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여자라거나 누군가의 자식, 혹은 명상가나 작가도 나의 진짜 브랜드는 아니다.
인간 자체가 나의 브랜드다.
나는 다만 신비(妙)라는 인간으로 불리길 원한다.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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