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말을 건다.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동시에 내 눈 깊숙이 그를 담는다.
내 눈으로 그가 성큼 들어온다.
그 순간, 다가오는 그의 몸을 통과하는 나 자신을 본다.
나는 유령처럼 투명하다.
다만, 아무도 느낄 수 없는 나를 느끼는 나 자신을 본다. "
인간을 떠올리면 별, 혹은 동그라미가 떠오른다.
흡사 어린왕자가 살던 소행성 정도의 모습이랄까.
동그란 땅덩이(?) 한 중간에 말뚝이 박혀 있고
우스꽝스럽지만 말뚝에 연결된 줄에 별의 주인이 묶여 있다.
물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줄은
주인의 행동반경에 따라 360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줄의 길이에 따라 별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줄의 길이가 비슷하거나 땅이 서로 가까이 있는 사람은
줄이 얽히고설키기 마련이며 이것이 인연이며 인과이다.
드물게 이 줄이 아주 긴 사람도, 줄을 끊고 비상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인간은 각자 그렇게 이 우주 공간을 떠도는 별이다!
인생길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져 다시 혼자가 되는 사람들.
아무리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혼자임을 느낄 수 있다.
아니, 결코 혼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독은 그렇게 더욱 더 풍요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 황폐한 도시에 나 말고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나 ‘척’ 또한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베스트프렌드이다.
나도 늘 배구공 윌슨과 이야기하고 신과 이야기하고
나 자신과 이야기한다. 그렇게 신과 만난다!
늘 혼자가 됨으로써, 혼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음으로써!
장 뤽 고다르는 자신의 영화 ‘열정(Passion,1981)’에서
영화, 열정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속 제작자는 영화 속 감독에게 말한다.
“관객은 스토리를 원한다!”
그러나 영화 속 감독은 단호하다.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스토리는 이미 끝났다!”
관객들은 아직도 스토리를 원할지 모른다.
소설을 읽을 때처럼 정당한 내러티브를 구할 수도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간의 오랜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라도 영혼의 울림을 원한다.
너무도 강렬해서 눈 감아도 자꾸 떠오르는 영상.
며칠째 잠을 설칠 만큼 오래도록 남아 있는 여운
어딘가에 꼭 살아 있을 것만 같은 우리의 주인공.
결국 “너도 나와 같구나!” 가슴을 치는 그 무엇!
나는 영화의 내용이 아닌 '영화'에 관심이 많다.
잡다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
그것이 한 인간이라면 그 사람의 히스토리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꿰뚫는 결정적 이미지!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를 빌리기 보단
영화란 무엇인가,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토크쇼 사회자는 찌질하게
과거사나 캐묻는 따위의 짓은 삼가야 할 것이다.
물론 그에 맞춰 변명이나 늘어놓는 게스트도 마찬가지!
내가 만약 대종상이든, 칸이든 영화제에서 수상소감을 말해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그 첫마디를 꺼낼 것인가?
“...영화는 꿈이죠?... ”
우아하게 웃고 난 뒤 이렇게 운을 떼지는 않았을까?
의문문처럼 끝을 살짝 높여 말하겠지만,
사실은 나의 시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에 겪었던 일이나 단지 추억이 아니라 영화 자체,
혹은 삶 그 자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말하는 것!
결국 우리는 7천원이라는 돈을 주고 한 시간 반
혹은 두 시간 동안의 '꿈'을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타인의 꿈에 잠시 초대된 우리는 스크린 앞에 앉으며
과연 어떤 꿈일까. 모종의 기대에 부푸는 것이 아닐까.
삶이라는 꿈속에서 우리는 다시 또 꿈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결국 꿈속에서도 꿈이 필요한 존재이다.
꿈을 파는 이는 그러므로 아주 멋진 꿈을 꾸어야만 한다.
그 인생, 통째로 멋진 꿈이 되어야만 한다!
많은 드라마나 동화들이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끝을 맺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들의 한 순간이 얼마나 찬란했던가를 기억한다.
흔쾌히 자신의 생을 걸었던 그 찬란한 순간 말이다.
고흐나 소로우를 불행했더라고 말하는 자는
자신의 생을 그 어디에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자다.
권정생과 천상병을 가난했다고 말하는 자라면
그 영혼은 또 얼마나 가난할 것인가!
연인들은 날마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 결혼을 한다지만
그들은 그 순간부터 다시는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단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행복한 결혼을 꿈꾸지만
함께 하는 그 순간부터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해야만 하는 것.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딜을 감행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까?
가족을 얻는 대신 찬란한 만남을 내어주는 거래!
가족이 있는 자의 고독이야 말로 참으로 가난할 터이다.
내 영화에서 ‘사랑’은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텅 빈 세상 속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그 인간은 ‘가득 찬 이’어서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노는듯 일하는 듯 다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가만 보면 그는 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세계를 하나의 일관된 모습으로 바꾸고 있는 것!
차츰 그 빛깔과 모양을 달리하는 그의 세계.
마침내 찬란하고 장대한 세계가 스크린 가득 펼쳐지고
카메라, T.B.(track-back) 하면 그의 세계는 더욱 거대해진다.
성을 짓듯 자신의 삶을 짓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영상으로 실현된 자못 성스럽기까지 한, 한 인간의 세계!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그 장면을...
그는 가슴 가득 ‘삶’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가만히 있어도 매순간 빛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
우리의 주인공에겐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이벤트도 필요없다.
그는 삶을 온통 ‘삶’으로 가득 채웠던 사람이며.
자신에게 골몰함으로서 타인을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다른 준비라면 가슴이 휑한 자의 몫일 터,
우리는 오로지 진정한 자신만을 가지고 만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 신에 대한 센스다.
그렇다면 만나는 그 순간 우리 훨훨 타오를 수 있다.
동시에 다 타고 그저 하얀 재가 될 수 있다.
아니, 흔적도 이름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
그저 투명해질 수 있다!
죽어 저승에서 다시 만난 사람처럼, 아니
수 억 겁 세월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다만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