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모욕하기 2

그 여자 모욕하기 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23:06

대부분의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 보통 한 가족의 대표가 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니라면 부모라도 모신다.

전체를 지휘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남자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온다.

반면, 여자들에게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다는 사실.

 

여자는 보통 자신이 소속된 울타리 안에서 안주할 수 있다.

남녀가 동등하다지만 여자에겐 사실 자신의 대표가 따로 존재하는 것!

빌어먹을 삼종지도는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통하고 있다.

물론 가족의 대표가 되는 여자들에겐 남다른 시선도 보태진다.

이것을 단순히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한다면 그에겐 책임회피의 혐의가 주어질 것!

 

남녀가 동등하다는 말은 단지 슬로건일 뿐 진실이 아니다.

단순한 이상을 현실로 착각한다면 대화는 시작조차 될 수 없을 터.

이것은 여자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남자라는 보호막에 둘러싸여 있다면

그 여자는 아직 독립된 개체라고 할 수 없다.

 

삶은 어차피 혼자 가는 길!

여자라고 해서 삶의 위험한 순간순간마다 자신만의 슈퍼맨이 나타나 줄 리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연약한 피해자로 남아 있을 수도 없다.

여자건 남자건 세상에 맨몸으로 맞서보지 않고서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

진실로 독립된 인격이며, 과연 자기별의 대표 자격이 있는가?

 

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는 어린애처럼 징징대는 여자!

아프다, 슬프다, 고프다,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보채는,

제가 좋아서 사랑해놓고 좀 가까워지면 납치되어 온 사람마냥  구는,

사람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것처럼 바싹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

그런 여자들은 왜 밤새 바가지 긁으며 울고불고 사람 목을 조를까? 싫으면 그냥 떠나면 되는 것을.

 

이상한 건 멀쩡한 여자들도 보호자, 즉 애인이나 남편만 생기면

갑자기 아프리카 난민이라도 되었는지 도움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

그러다가 성에 차지 않으면 삐치고 토라지고 징징거리기 일쑤!

나는 솔직히 남자보다 여자라는 동물을 더 이해하기 어렵다.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일진대 어찌하여 늘 보호막 안에 숨어있기만 하는가?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랐다면 이제는 한 인간으로 당당하게 데뷔를 해야 한다.

언제까지 스스로를 어린아이로 규정하고 마냥 인간지망생으로 남아 있을 텐가?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아 아직도 어른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강 건너에서 발 동동 구르며 떼를 쓰는가 말이다.

보호받는 것과 사랑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무것도 담지 않은 투명한 눈빛으로 저기 먼 풍경을 바라볼 일이다.

그 풍경이 바로 내 마음 속 풍경이 되어야 한다.

울 일은 무에 있고, 원망할 일은 또 무에 있는가?

삶은 그리 길지도 멋지지도 않은, 그저 조금 드라마틱한 길!

언제라도 벌떡 일어나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지친 나그네가 잠시 길가의 나무 그늘 아래 땀을 식히듯

그렇게 가볍고 홀가분하게 쉬어 가면 되는 것을.

징징대며 들러붙는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홀로 가는 나그네!

지금 이 순간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영원하리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남녀 구별은 있어야겠지만 여자라는 것을 무기 삼는다면 곤란하다.

남자가 강하다는 것을 무기 삼으면 협박이 되지만

여자가 약하다는 것을 무기 삼으면 응석이 된다.

남자는 눈을 부릅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폭력이 될 수 있고

여자는 남자가 폭력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빌미 삼으면 그것이 곧 폭력이다.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받을 충분조건이 될 뿐,

왜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 하는가? 그냥 사랑하라!

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당당해져라!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부디 산뜻해져야 한다.

 

하긴 웬만한 남자들은 다른 별나라 여자와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않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가족이 되는 것!

남자는 가족 전체를 잘 지휘하고 이끌어나가면 된다.

그 남자는 가족의 대표자격을 얻은 것이니까!

 

가족은 대화의 상대이기 보단 보호할 대상이 되는 법!

웬만큼 독립적인 스타일로 밀고 나가지 않고서야

두 사람 다 제각각 독립적이기는 어렵다.

또한 제아무리 독립적인 성향의 여자라 해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이미 안착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어렵게 한다.

 

여자가 가장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결혼제도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는 어쨌든 독립적이기 어려운 법.

나의 히로인을 모욕하기란 참으로 간단한 일이다.

일찍이 진리의 편에 서서 살아온 한 인간에게

결혼이니, 노후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것.

 

결혼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보험으로 생각하고,

노후에 대한 염려보다는 삶의 완성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 길이 아니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코 그의 존재를 두루뭉수리로 뭉쳐서 혹은 생략해서 말해선 안 된다.

나의 히로인에게 있어 독립성만큼 양보할 수 없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히로인과 결혼의 관계는 상극이다.

짝을 이루고 사랑받고 안주하기 보다는

홀로 고독하게 벼랑 끝에 서 있기를 즐겨한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고자 했으며

제 몫을 못해 묻어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나의 히로인을 남자라고 해도 별로 할 말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가 날이면 날마다 생사의 기로에 서고,

혹은 딜레마에 빠지곤 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 장부로 사는 일이

남자로서 그러기보다야 당연히 드라마틱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는 스스로 영원히 남을 영화를 선택한 것!

훗날의 흥행여부를 점쳐보는 일도 아주 재미있는 일상 중 하나이며

무엇보다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이니 괜찮은 작품이 나올 터.

특히나 고무적인 일은, 흥행은 되지 않는다 해도

나의 히로인이 아주 특별하므로 이미 그 영화는 졸작은 넘어섰다는 사실!

 

어서 빨리 크랭크업하기만을 바랄 뿐.

흥행도, 대박도 그다지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나의 히로인과 같은 별에 살고 있는 감독 한 사람 만난다면

이 영화에 영감을 받은 그가 훗날 또 다른 영화 하나 남기길 바랄 뿐이다.

그것으로 이 영화는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동그라미 그리기

동그라미 그리기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22:51

팔을 올려 자기가 그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큰 동그라미를 그려야 한다.

그것은 바로 각자의 영토!

크고 긴 팔을 가진 사람은 큰 동그라미를 그렸을 것이고

짧은 팔을 가진 사람은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을 터이다.

자신의 크기만큼 그렸으니 그것은 곧 자신의 몸집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

그것에 대해 변명하거나 타인에 그 몫을 전가해선 안 된다.

영혼이 없는 자의 고백은 가련할 뿐.

제 영혼을 수습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초대장을 뿌려댄들 텅 빈 축제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동그라미가 작은 사람도 얼마든지 그 안에서 잘살 수 있다.

애초에 몸집이 작으니까 좁은 곳에서도 답답한 줄 모르는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산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아주 긴 팔을 가진 거인도 존재한다는 사실!

당연히 거인들은 아무 초대장이나 받아들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법!

삶은 계속되고 또한 축제도 가끔은 벌어진다.

작은 별에서는 그에 걸맞은 앙증맞은 파티가 벌어지겠지만

거기에 관심가질 이는 역시 엇비슷한  체구를 가진 이들 뿐이다.

바깥세상이 두려워 금 밖으로는 나갈 엄두도 못내는 우물 안 개구리들!

 


그러나 문학을 하는 사람들, 혹은 예술가라면

마땅히 그 금 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보다 넓은 세계와 만나고 편견과 금기를 깨는 방법으로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들 예술가의 무모한 도전으로 인해

더욱 넓은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바로 예술가들의 자유를 질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예수의 죽음을 질투하는 이가 대부분인 이 세상에서

그래도 예술가들은 그들 평범한 인간들을 대표한다.

평범한 이에게는 그것이 한낱 방종과 타락이겠지만

예술가들은 아랑곳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뿐.

 


함부로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참된 예술가들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임을.

소박한 아저씨, 아줌마들의 무임승차야 예전부터 있어온 일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저 동창회에나 나가 떠들면 될 일!

어차피 서로 마주칠 일도 없다.

 


작더라도 별의 크기가 같다면 서로 만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서로의 별을 채운 그것이 다르다면 충돌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럭저럭 지지고 볶고 사람 사는 향내를 피우며 살 수는 있을 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들 하지만

천만에! 그것은 가련한 신세한탄에 자기위안일 뿐.

 


사실을 말하자면 같은 별에 살고 있는 사람끼리 교류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큰 별사람이 작은 별에 갈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작은 별에 갈 땐 질식사를 각오해야 하고,

큰 별에 갈 땐 광대한 그곳에서 혹한에 얼어 죽을 각오쯤 해야 한다.

또한 볼 일 끝났으면 주저앉아 있지 말고 얼른 제 별로 돌아오는 센스도 발휘해야 한다.

 


열두 시가 되면 신데렐라의 마법도 풀리는데

타인의 세계가 제 몸에 딱 맞을 리 없다

만남도 좋고, 사랑도 좋지만 그것이 곧 ‘밀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영혼은 각자 엄연히 독립된 것!

천지분간 못하고 어정대다가는 자칫 비명에 가는 수가 있다.

 


문제는 각  세계간의 거리!

진리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별 사람끼리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 만날 수 있다.

텔레파시로도 만나고, 대기(大氣) 중으로도 만나고, 꿈으로도 만난다.

그러나 서로가 버린 것들로 제 세계를 가득 채운 이들끼리는 그럴 일이 없다.

각 영혼의 세계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그것!

 


대다수의 사람들에 있어서 사랑은 그저

서로 꼭 붙어 있거나 아니면 헤어지거나 둘 중 하나!

그러나 그 둘 사이 아슬아슬한 어느 지점에 사랑의 정수가 있다.

사랑한다는 것과 서로 의지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

사랑은 보험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만날 때 그 눈에서 ‘처음’이 보이고 헤어질 때 ‘마지막’이 보여야 하는 것!

서로의 법이 일치함으로써 짜릿한 전율이 있고

그 빛깔과 향기가 다름으로써 신비로움이 있는 것!

또한 애초에 서로가 같은 별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일!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언제나 홀로 세상 끝에 서게 되는 것!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몇 백 년 전 갈릴레이는 말했다지만

종교재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저 죽을 줄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 길로 휘적휘적 걸어가야지!

나는 가끔 이 시대의 종교재판을 보는, 환영 아닌 환영에 시달린다.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사랑은 정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정착하지 않는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22:36

사랑은 정착하지 않는다!

나의 세계의 재료 역시 사랑이다.

그러므로 내가 정착할 일은 없다. 특히 인간에겐!

인간이 아니라 나의 세계와 진리 혹은 그것이 신이라 해도

그것에 안주하느니 차라리 세계를 부유하는 티끌이 되리라!

 


어쩌면 나는 태생적 유목민이다.

아니, ‘부유(浮遊)인’이다.

먼지처럼 떠돌아 세계를 섭렵하는 것,

끊임없는 부유, 결정지어지지 않는 것, 이름 없음이 나의 취향이다.

그게 바로 생(生)이라는 매력적인 이름인 것이다.

 


물론 나도 가끔은 다른 별에 놀러갈 때가 있다.

그러나 편협한 그곳에선 이내 질식사를 당하고 만다.

애초에 오래 있을 곳이 못되었다.

그곳을 빠져 돌아온 나의 세계는 청량하다.

돌아오면 나는 제일 먼저 창을 열고 긴 호흡에 들어간다.

 


당연하지만 내 세계에는 고대의 왕이 왕비를 기리기 위해 지은 궁전 따위는 없다.

또한 황제의 권력으로 지은 장성도,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든 도시도 없다.

그저 원시림과도 같은,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

나는 나의 세계 최초의 왕인 것이다.

 


그렇다. 오래전 나는 내 영토에 나라를 세웠다.

그곳은 꿈과 자유와 사랑이 너울너울 춤추는 곳.

또한 게으름과 미친 짓과 실수가 아기처럼 방글거리며 미소 짓는 곳이다.

아니, 어쩌면 무법과 비도덕의 천국일지도!

그러나 세계 전체를 꿰뚫는 법은 분명히 존재하는 곳이다.

 


그 누구도 쳐들어오거나 더럽힐 수 없는,

마치 소도와도 같이 신성한 곳.

광대하지만 황량하지 않고 원초적이지만 거칠지 않은,

여전히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매혹의 땅!

나는 그 풍경들의 영원한 주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크던 작던 각자 자기별의 대표!

‘나’라고 말하는 것에 정말 ‘나’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라고 말하는 것에 ‘나 아닌 것들’을 포함시키는 것.

즉 나의 -그것도 부분적인 - 대표가 되지 말고 ‘우주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나의 진정한 주인이 됨과 동시에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

물론 신에 도발한 발칙한 자의 이야기이다.

대신 각자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것들로 제 별을 가득 채웠을 터.

과연 주인이란 자는 무엇으로 자기 세계를 채우는가?

바로 내가 인간을 보는 관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을 닮아간다.

그 사람이 믿는 것은 곧 그 사람 그 자체!

산이 좋아 산에 가서 산이 된 사람이 있듯

인간은 제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 되는 법.

오늘도 나는 엽전처럼 생긴 군상들이 보기 싫어 TV채널을 돌리는 것이다.


 

나도 이제 세상에 데뷔한 지가 꽤 되었다.

횟수로 따져보아도 이미 신인은 아니다.

당연히 주연상쯤 받을 때가 되었다.

내 인생의 여우주연상을 받고 싶다!

물론 최우수감독상도 결코 양보하진 않겠지만.

 


나는 내 영화의 주인공이자 감독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최우수작품상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그 판단은 뒷사람들의 몫이기도 한 것!

내가 날마다 후세의 심사위원들에게 줄

뇌물을 연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삶의 제사장!

인간의 것이 아닌 내 영혼이 도달할 그것에 날마다 기도를 올린다.

제물은 반드시 침묵과 고독으로 준비한다.

반면 신은 아침마다 내 창을 두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가끔 신이 나를 편애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긴 철없는 아이처럼 만날 매달리고 징징거리지 않으니,

적어도 부담스럽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신의 보답에 관심이 없는 이, 그 한 사람을 찾는 것이 바로 신의 고민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제가 얼마나 신에게 부담을 주는지 모르고 있다.

 


왜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여 사랑을 질식시키는가?

왜 자신의 무지와 외로움을 사랑이라 가장하고

한사코 신을 (혹은 타인을) 곁에 붙잡아 두려고만 하는가?

왜 가던 길을 멈추고 주저앉아 편안해지려고만 하는가?

왜 비루한 자신에 스스로 만족하는가?

 


사랑이란 마치 신의 그것처럼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는 것!

또한 신처럼 매 순간 깨어 자신을 지켜보는 것.

그리하여 타인에게서조차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가까이 있을 때 정작 가까이 있지 않음을 알고

멀리 있을 때 진정 멀리 있지 아니함을 아는 것이거늘!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나의 열등감

나의 열등감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22:28

삼차원에 사는 사람에게 사차원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평면의 세상에선 입체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언어는 단어와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맥락으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세계를 뛰어넘는 수밖엔 없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 다리의 재료는 오로지 사랑.

그곳에서 두 다리를 각 세계에 튼실하게 딛고 있어줄,

거인이라도 필요하다.

 

 

 

말이란 공허하다.

세상엔 남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타인의 세계에 무관심하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소양이 없고, 인간에 대해 기본적으로 무지한 탓!

인간이란 과연 어떠한 존재인지 그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예비 되지 않는다면

말은 언제나 그렇듯 타인의 가슴에 가 닿지 못할 것이다.

타인의 세계를 인정할 것!

그곳은 다가갈 곳이 아니라 인식할 곳이다.

제사가 그렇듯 두 세계의 만남은 지극히 성스러운 것이다.

예절이나 형식보다는 진지하고도 성스러운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세계가 확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화를 시작하려고 주의를 환기시킨 한 마디를 얼른 낚아채는 이도 있다.

그는 끝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과는 대화를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물론 불러도 대답이 없다.

약속 장소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신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가 빈약하여

영영 타인의 세계에 초대받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거니와,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는다.

말을 한다는 것은 짜디짠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은 것을!

 

 

 

인간은 대부분 살인자이다.

사는 동안 아마도 수많은 생명을 살해했을 것이다.

연인의 독립선을 침범하여 죽이고 사랑을 구속하여 죽이고,

말로도 죽이고, 눈빛으로도 죽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관계에 안주하여, 수많은 ‘관계’들을 죽여 왔을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그 분야의 최고수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내가 이렇게 살의를 느끼는 것은

그 옛날 내가 수 명의 인간을 살해했다는 증거일수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살해할 마음을 먹고 있다.


 

 

 

그렇다.

신은 전쟁을 원한다.

태어나고 만발하고 흐드러지고 부딪히고 깨지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고!

격정에 이끌릴지언정 거짓평화 따위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위선이 옳았다면 세계는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시의 이라크 침공 따위는 전쟁이 아니다.

진정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니, 태곳적부터 이미 진행 중이다.

인간은 전쟁의 참맛을 모르기에 평화의 진정한 형태도 모르는 것이다.

눈치보고 경계하고 파수(把守)서고, 추악한 것을 보면 고개를 돌리는가?

회피가 더욱 끔찍하다.

영혼대신 차라리 이 사회의 도덕에 올무를 씌워라!

 

 

 

산악인은 마음이 좁지 않다.

정상에 서 보았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아랫동네를 굽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며,

매 순간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는 편견이 많지 않다.

그들의 마음은 우주에 살기 때문이다.

드넓은 우주 공간을 아우르며

어느새 소소한 일상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주 비행사는 유유자적하다.

그들은 무중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 다 버리고 그저 몸뚱이 하나로

신비한 우주의 속살과 맞대면 해보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포지션이다!

정상에 서 본 사람,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르다.

전체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눈높이가, 스케일이 다르다.

아니라면 아이라도 낳고 길러볼 일이다!
사사건건 대꾸하고 반항하고 투정부리고 어깃장 놓는 것이

그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 혹 알게 될 지도 모르잖는가?

그러나 아기를 낳아본 이가 반드시 철이 드는 것은 아니며,

죽음을 경험(?)한 이 모두가 새로운 버전의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영원한 ‘순간’도 모두 꿈처럼 흘려 버리는 가공할 기억력.

일찍이 내 열등감은 '인간'이었다!

 


 

언젠가 사막 마라톤을 본 적이 있다.

선수들은 제각기 홀로 멀리 떨어져 태양과 바람과 사막과,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그 고독한 사투가 우리네 삶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들러붙고 엉겨붙고 얼렁뚱땅 친한 척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중 단연 최고가 아닐까.

 

 

이 황막한 사막에서 나는 비상을 꿈꾼다.

한 여름 그 바다를 강타한 태풍처럼 그렇게 홀연하게,

어쩌면 장엄하게 사라지고 싶다.

그렇다. 나는 가장 크게 살아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혼자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

나는 목하 게으름 중이다. 가난도 즐겁다.

어느 순간 내가 찬란하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 그 자체 때문이며,

가짜는 단 하나도 없이 존재감 하나만으로 나의 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으니까!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신비(妙)어록 2

신비(妙)어록 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22:06

 내가 쓰는 글은 전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관찰한 글이다.

나는 나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

따라서 오지랖이 넓은 편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

나 자신을 관찰하기에도 시간(?)은 늘 부족하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얻으셨나요?"하고 새삼스레 묻는 이도 있다.

그 황당한 질문에 답하기란 유치한 일이거니와

신비(妙)어록은 단지 내 상상의 산물이거나 어떤 이상향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나 자신을 관찰한 <절대 인간보고서>이다.

타인의 생을 보듯 나 자신의 생을 지켜보고

마치 일기처럼 순간순간을 기록한 내 삶의 연구서!”

-08.10.02 그 세계는 고독하다! 중-

 

그래서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영감이 떠오르면

몸은 그 일을 하더라도 정신은 다른 곳, 즉 나의 세계에 있다.

가령, 운동을 하거나 드라이브, 친구와 마주 앉아 있을 때에도

내 세계에 몰두하느라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기가 어렵다.

 

“죽림칠현처럼 유유히 살겠지만, 할 말도 다하고 사는 겁니다.

세상 꼴이나 인간들이 내 맘에 꼭 들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개입하지도 않는 겁니다.

단지 내 이야기를 할 뿐이지요.

그러다보면 독백이 되기도 하고 대화가 되기도 하는 거지요.


제가 '세계'를 굳이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우린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그러니 나는 나 외에 다른 인간에겐 관심이 없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관심이 있다 해도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뭘 어쩌겠어요.

신도 인간에게 그런 기대를 하진 않습니다.

단지, 신도 독백을 하는 거죠.”

-07.12.29 대화가 동문서답이 되는 까닭 중-

 

타인에게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일까만,

나는 신과 대화할 뿐이고 나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신에 도발한 불경한 존재!

내 세계에 관한한 그 누구도, 설사 그것이 신이라 해도 참견은 불허한다.

 

 
“하여간 편안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저 맹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까칠하게 구는 것과는 구별되는 그것.

유연하되 자신의 세계에 대해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08.10.08 대꾸하지 말라! 중-

 

 
또한 여기는 나의 서재이며 안방.

내 글을 읽지 않고 나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른다면 일단 댓글 달기를 삼가야 한다.

모르면 실수를 하게 되는 법!

차라리 결투를 신청한다면 받아 줄 용의는 있다.

 

폼나게 진검으로 승부를 나눠야겠지만 뭐 안 되면 닭싸움이라도 하지 뭐.

하여간 나라면 수천 수백이 몰려와서 말싸움하자고 해도 안 한다.

낚시라고 해서 낚을 의도가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 단지 말꼬리 잡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봤자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결과밖엔 안 되니까.

 
"대부분의 남자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을 투우장의 투우사쯤으로 착각한다.
기선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 모습은
차라리 미로 속에 갇힌 햄스터 같다.
전쟁이 남자들의 놀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
...
달리 스승과 제자가 아니다.
자신보다 앞선(?) 이에게 부담을 느끼면 그 순간 스승과 제자가 되는 거다.
그래서 남자들은 곧잘 요상한 방법을 쓰곤 한다.
추종하지 않는 방법으로 추종하기,
맞겨루는 방법으로 노예 되기. 무시하는 방법으로 집착하기.

 

그러나 그것은 전쟁을 하면서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고, 주지 않으면서
백퍼센트 자신을 펼쳐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삶 안으로 깨달음을 안고 들어와야 한다.
어설픈 초짜의 촌티를 벗고 비로소 완성된 캐릭터를 가지는 것.

 

진짜 게임은 삶의 매 순간 일어난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산을 만났을 때,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를 만났을 때,
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자기 자신, 혹은 신과 게임을 벌이는 것.

 

왜 하늘에 대고 도발하지 못하는가?
왜 신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는가?
“이 정도로 나를 꺾어 보시겠다? 내가 여기서 멈출 것 같은가, 교활한 양반 같으니!”
왜 외치지 못하는가?
똑같은 인간들끼리 게임해 봤자다.

 

신과 게임을 벌이기.
삶을 걸고 올인하기.
텅 빈 길 위에 서서 외치기.
거침없이 달리기.
인생은 로드무비, 결국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다! "
-08.08.21 누구, 인간을 만나 보았느냐? 중-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다.

자존심을 지키고, 남에게 의존하여 엉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제법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다.

스승과 제자가 없다는 말은 스스로 제자 역할 하지 말라는 뜻!

 

즉, 아무 때나 묻고 기대고 엉기고 추종하거나 맞먹으려하지 말라는 뜻이지

결코 내가 스승이 아니라거나 다른 이들이 제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즉 사회적 위치나 나의 행동반경을 포함하지 않은 의미라면

내가 인류의 스승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뭘 모르는 자!

하여간 누군가 나의 세계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다는 것은

내가 타인의 사생활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나는 연예인처럼 사생활 노출되는 것도 싫고, 빌어먹을 공인이 되는 것은 더욱 싫은 사람!

 


달마실 분들이라고 해서 나의 세계에 대해 시비를 걸어도 되는 건 아니다.

하여간 나의 세계는 늘 진화하며 또 완전하다.

세상에야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따위는 없지만

나의 세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일도 벌어질 수가 있기에 일단 그 존재에 대해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의 세계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 혹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많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는 행동, 할 수 없는 말들이 내겐 아주 많은 것이다.

그건 그런 일을 하는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아주 당연한 것들!

 


여기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타인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그만큼 나는 나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뜻.

내가 그렇게 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느꼈을 때 바로 그때가 아름답더라,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세계의 그러한 풍경들을 완전하고 아름답다고 여기기에 자주 스케치할 뿐!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을 필요는 없다.

내 세계가 아닌 이상 그저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도록 나는 아주 조금 발을 담그고 있을 뿐.

내겐 소중한 것과 전전긍긍 목맨다는 건 전혀 별개의 뜻.

공짜글이라 잘 모르겠지만 신비(妙)어록은 읽을 자격이 필요한 글이다.

 


그저 내 세계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살아가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

책은 안 팔려도 좋다.

독자는 단 한 사람이면 족하니까!

 


어차피 나는 그 어떤 기대를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달마실이라고 해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이 없으란 법도 없고

지금 여기가 신대륙인지, 구대륙인지 구별이 안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다.

상관없다. 여기는 내 세계가 아니니까!

 

 


“사랑을 바란다면, 대화를 원한다면, 소통을 갈구한다면

스스로 먼저 빛나는 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신에게 빚진 사람.

혹시라도 나에게 말을 걸려면, 적어도 신에게 먼저 빚을 지고 와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을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나서라야 하는 것!”

-08.01.15 나, 그리고 깨달음 중-

 

 

단지, 말하고 싶은 건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

그건 내가 타인의 생에 관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너무 끈끈해진다는 것.

또한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끼리 말씨름해봤자 공염불이라는 것.

다만, 우리 어느 한 순간 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

 

 

"불경에 통달한 노스님이 온다 해도 제 할말은 역시 같습니다.
말귀 못 알아들으면 역시, “당신 말이나 좀 해보시오!” 하고 구박할 겁니다."
-08.01.29 내겐 너무 어려운 글쓰기 중-

Posted by 신비(妙)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5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5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21:50

학교 다닐 때에 보면,

늘 옷자락을 붙들며 들러붙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면전에서 낯간지러운 칭찬을 해대고

제 우상의 몸종이 되어 시중들기(?)를 자청한다.

제가 타인과 동등하지 않은 것에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들.

스스로를 낮추기에 익숙한 자들은 또한

타인을 업신여기기에도 인이 박혀 있다.

자신보다 나은 이는 추종하고 자신보다 못한 이를 업신여기는 일은

그들에겐 아주 간단한 일일 터, 그들에게 인간은 동등하지 않다.

 

 


그런 자들일수록 자기 위치를 재빠르게 파악할 줄 안다.

대통령은 자기보다 잘났으니 각하라 부르며 따라 다니면 되고

운전기사는 저보다 못났으니 무시하면 된다.

이런 부류는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는 선생님이라 부르며 굽실거리고

간호사에게는 제법 큰 소리를 친다.

물론 의사도 등급이 나뉠 것이다.

이런 이를 만나면 젊은 레지던트들은

간호사나 마찬가지의 대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제가 더 가진 게 많다고 여겨진다면

병원원장쯤은 비서 다루듯 하겠지만.

 

 


그러니 신에게서의 독립은 꿈도 꾸지 못할 일!

그저 신이 자신을 선택해준 것에 대해 감지덕지, 의기양양이다.

신에게 선택 받았다고 믿는 수많은 종교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신은 인간을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 신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영혼이 가난한 자에게도 태양은 그 빛을 비추고

천성이 악한 자에게도 대기는 그 품을 내어주듯이

신은 노아의 방주에만 그 빛을 비추지는 않는다.

아니, 노아의 방주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한다면 함부로 신을 선택한 담대하고도 발칙한,

유사 이래 몇 안 되는 그이들의 마음속에나 존재할 것이다.

“신이여, 더욱 강해지고 아름다워질지어다!”

그리하여 거듭 나는 외치는 것이다.

 

 


하여간 지금 이 순간에도 붉으락푸르락 흥분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신의 은총을 받은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긴 노예근성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야 없겠다.

선생님 앞에 앉은 다소곳한 학생회장처럼

천자 앞에 엎드려 절하는 신참 왕처럼

얌전하게, 겸손하게 신의 뜻이나 따르며 살다 가라지.

 

 


걸핏하면 신성이 침범 당했다고 호들갑 떨어대는 그들에게.

성적 소수자들이야 당연히 신에게 도발한 불경한 존재!

호들갑 떨며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이나

막상 스타가 죽었다고 하니 꽃다발 받쳐 들고 무덤 찾아가는 인사들이나

근본에 있어서는 다 같다.

인기 있던 이에게는 그나마 유래 없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진다지만

죽은 이가 그들을 반가워 할리 있겠나?

나라면, 죽어서도 그들 역겨운 자들을 봐야 한다면

차라리 저 우주 밖으로 다시 사라지기 위해 한 번 더 나를 죽일지도 모르겠다.

제 안에 제가 없는 허깨비 같은 자들.

사랑이 떠나고 나서야 사랑타령하고, 진실이 가고 나서야 진실 타령하는 자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어느 바보 같은 작자의 말일까?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가까이 있을 때 정작 가까이 있으면 안 되며

멀리 있을 때 오히려 멀리 있으면 안 된다!

 

 

어쨌거나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사랑’이란 말로 허겁지겁 허한 가슴 채우는 이는 봤지만

사랑 그 자체를 가슴 가득 품어 안은 이는 거의 보지 못했다는 사실!


누구나 살아가는 모습은 같다.

시선과 태도와 그 순간순간이 다를 뿐!

눈이 깊지 못하면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타인에 신경 쓰다 보면 진정 보아야 할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저 생의 파편들과 씨름하며 전 생을 보내야 한다면 그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그들 서글픈 영혼들을 위해 흘려야 할 것.

나는 오늘도 저 푸르른 하늘이 그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왜 하늘에 대고 도발하지 못하는가?

왜 신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는가?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대꾸하지 말라!

대꾸하지 말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21:38

한 때 TV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당연하지> 게임이 있었다.

상대의 곤혹스러운 질문에 동요하지 않고 ‘당연하지!’로 답한 다음

다시 상대를 쩔쩔매게 만들 만한 질문을 던지면 성공하는 게임.

만약 상대의 질문에 당황하여 당연하지를 외치지 못하거나

얼떨결에 그 질문에 답을 하게 되면 게임 끝! 지는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무언가를 아는 양반이던가.

이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가 아니다.

물론 난처한 질문을 해서 상대를 혼미하게 하는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난폭(!)한 질문공격에 동요하지 않는 것.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제 할 일, 즉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법 의미심장한 놀이가 아닐 수 없다.

게임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이 같은 일은 늘 벌어진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누군가 말을 하면 대꾸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내 보기에 인간들은 이른바 질문 공포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선문답 비슷한 분위기라도 풍기게 되면 그 강박은 더욱 심해진다.

 

답은 하나다. 자신의 세계를 가꾸는 것!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 나온 자신의 이야기를 품는 것.

제 안에서 우주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대해 할 말이 끓어 넘치지 않는 한

상대의 말에 연연하여 당황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반사적으로 상대의 말에 대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상대의 페이스에 말리는 것!

이른바 ‘낚시’라고 한다.

누군가 튀는 행동을 하면 반사적으로 비난을 하는 것이나

자신을 나무라거나 공격하면 당황하여 본능적으로 변명을 하는 것이나

죄다 미끼에 걸린 것이다.

 

문제는 남이 꿈처럼 펼치는 이야기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는 그 이야기를 할 때 아마 눈을 뜨고 꿈을 꾸지 않겠는가?

거기에 대고 "당연하지!"를 외치는 것은 뻔뻔한 무임승차.

“아니, 그렇지 않아!” 반대하는 일은 미끼를 문 것.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니까 그러고들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피곤한 이유가 그것이다.

“잘 지냈니?” 인사만 해도

“뭐 잘 지낸 것도 아니고 잘 안 지낸 것도 아니고...”

주절주절 말이 길어진다. 답이 길어진다.

그런 사람과는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인사조차 나눌 수가 없는 거다.

 

인사만 해도 피곤이 몰려오고,

한 나절을 마주 앉아 있어도 전혀 눈빛도, 마음도 나눌 수 없다면

서로 다른 별에 앉아 있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남의 이야기는 온전히 놔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일이다.

말꼬리는 바로 미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그 빛깔과 향기를 달리할지라도

서로가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이 소통인 것!

물론 아주 어렵고, 역사적으로도 드문 일이긴 하지만.

별이 저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행복할 수 있었듯이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것 아닐까?

 

하여간 편안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저 맹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까칠하게 구는 것과는 구별되는 그것.

유연하되 자신의 세계에 대해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남의 뒤에 얼렁뚱땅 줄 서지 말고 당당하게 값을 치러야 한다.

누군가 운을 띄웠으면 자기 흥으로써 압운을 달아야 하는 것.

그렇지 않다면 이 광막한 우주에 홀로 있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소통하지 못해 타의로 혼자라면 당연히 처절하게 외로울 터.

 

우리는 각자 제 별에 앉아 다른 별과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소통이란 영혼의 오르가즘!

결혼한 이들이 늘어놓는 개그 같은 푸념들도 나름 이유는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왜 그런 죽은 관계가 한심하지 않겠는가?

사랑은 생명 그 자체인데 말이다.

 

생명은 생명으로서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의무와 권리가 있는 법.

그러나 돌아보니 이 텅 빈 들판에는 아무도 없구나!

어쨌거나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 가난한 자에게도

대기(大氣)라는 소통의 메신저가 있어 그것으로 생의 의미를 다했다는,

그런 전설이 우주의 어느 한 구석에 전해내려 온다는 사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그런 이의 눈빛이 좋다!

그런 이의 눈빛이 좋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7:16

깨달음에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제 안의 가능성을 백 프로 끄집어내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나

제 안에 없는 그 이상의 것은 나올려야 나올 수 없다.

그저 제가 느끼는 제 백 프로를 펼칠 수 있으면 된다.

인간은 편안한 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깨달음뿐 아니라 매사에 강박을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스타일 맞지 않는 사람끼리 마주앉아본들 무엇하겠는가?

 

집에 불이 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들고 나올 것인가?

이런 가정이 있을 수 있겠다.

통장이든 금덩어리든 실제로 가장 소중한 것이 될 터이다.

나에겐 그것이 내 외부에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므로 여유작작한 모양으로, 마치 불사조인 듯 걸어 나오는 것도 좋겠다.

 

영화 <타짜>에서, 나름 멋지던 정마담이 조금 우스워보였던 장면이 있다.

돈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곤, 꼭 제가 불에 덴 모양 호들갑을 떨었던 것.

사람의 눈빛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가이다.

먼저 매 순간 자신의 눈빛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거울을 보고 연기연습을 하는 연기자의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런 자신의 모습을

저기 먼발치에서 마치 남을 보듯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선이 차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자연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생각까지도 보이는 지점이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찰나이다.

그 찰나가 영원이 된 듯 멈추는,

지극히 환타지스런 장면이 내 영화에는 있다.

마치 나르시소스의 그것과도 같은,

스스로에게 매혹되는 범우주적인 사건. 그것은 기적이다!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생각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이 보기에 세상이 끝난 일에도 그저 덤덤하던 나를,

나는 진작 알아 보았노라고,

때로 외계인 취급을 받긴 하지만 그게 나라고.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

좋고 나쁘고의 이분법에 매여 있는 것이나 같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불편한가.

삶의 스타일이라고 할까?

 

영화도 아무 영화나 기억하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입에 침이 마르는 영화, 대부분은 별 거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집, 좋아하는 분위기.

나를 외계인이 아니라 자기 별나라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하는 이!

내게는 스스로에게 편안한 그런 풍경이 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아무리 매력적인 사람도

그 부모나 가족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매력이 반감된다.

구구절절 가족 이야기에 눈물짓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더욱이 부모나 가족이 그의 삶과 일상에 직접 개입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애인이나 배우자, 혹은 부모나 자식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

내게는 당당하고도 독립된, 진정한 어른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당연히 이 세상에 혼자인 듯 고독한 사람이어야 한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이가 아니라,

언제든 훌훌 버리고 떠날 수 있는 허허로운 뒷모습을 가진 이!

 

죽음은 별 게 아니다.

여러번 겪어 봤지만 그것은 분명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죽을 때가 아니라,

단 한 순간도 '스스로' 빛나지 않았을 때 허무하다.

상대적인 평가에서 벗어나 절대의 극점에 올라서야 한다.

 

남들이야 뭐라고 하던 굳건하고도 찬란한 내 세계를 건설하기.

삶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오히려 편안한 것!

아무도 모르는 보물을 가슴 가득 품은 기분으로

죽음을 죽음이 아니라 보험으로 생각하기.

'푸근한 고향이 등 뒤를 받쳐주고 있는데 세상에 무서울 것이 그 무엇이더냐!'

 

하여간 인간으로 태어나 웅지를 품었다면

저 혼자만의 무인도로 떠나 고독하게 준비할 일이다.

관계 자체를 새로 세팅할 수는 없겠지만

드물게는 자기 자신을 새로이 세팅할 수는 있는 법이니까!

인간은 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매력적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인다.

 

계몽영화나 억지감동의 신파를 요즘 누가 잠자코 보겠는가?

흥행요소를 참조해 볼 것!

말이 필요 없다.

집에 황금 송아지가 백 마리 있다면 직접 갖고 와서 보여주면 되는 거다.

있거나 말거나, 있다고 큰소리치는 건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그것이 최고의 경지이다.

장난감이란 자기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것 아닌가!

다른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가지고 놀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 한 번 살아갈 만한 준비가 된 것이다.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말 수 줄이기.

답답함, 혹은 억울한 말 듣기를 즐기기.

반사적으로 대꾸하지 않고 기다리기.

변명은 물론 설명하지 않기.

함축적으로 말하기.

 

원래 쉬운 일은 매력이 없는 법이다.

눈빛에 연연한다면 당연히 눈에 힘이 들어가겠지만

검사가 경직된 몸의 힘을 빼고, 칼을 자신의 몸처럼 움직일 수 있을 때 고수가 되듯

홀로 삶에 천착하며 여러 사람 가운데서도 혼자되어 깨어있다 보면

절로 저 어려운 일들이 이루어질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그 어디에도 마음 두지 않기.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바람같아야 하는 법!

매 순간 떠나는 이가 되어 볼 일이다.

아니, 매순간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바라볼 수만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삶의 포도주 한잔 비울 일이다.-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그 세계는 고독하다!

그 세계는 고독하다!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7:10

어찌 보면 명상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다.

스케일 크게 생각하자면 ‘내가 만약 신이라면?’

이 하나의 전제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나 여태껏 그 말 알아듣는 이 하나를 보지 못했다.

하긴 알아들었다 해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알아듣고 행하려 하면 어떻게 해도 그 말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행이 먼저고 스스로의 그 행을 알아차리는 것이 나중의 일이다.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또 이미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겠지만

장담하건대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진짜로 아는 이는 없다.

진정으로 아는 이는 결코 안다고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물론 이해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그건 비밀이다.

또한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또한 스타일이 있는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

 

사람들은 언제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신’이라고 말하면 대번에 그 권력을 떠올리는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내가 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이 내가 되는 문제는 세상과는 하등 무관한 일이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세상 탓을 하며 혀를 차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세계가 빈약한 이의 변명이 될 뿐이다.

잘난 체 해가며 세상 탓을 한다고 하여,

자신의 세계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글을 많이 읽는다고 하여 그리된다는 보장도 없다.

타인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어쩌면 환상의 세계에서 허깨비를 쫒는 것!

남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또한 ‘우주’라고 하면 그저 헛바람이 들어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허황한 소리를 해대기가 일쑤.

아멜리 노통이 메타포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신이나 우주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있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얻으셨나요?"하고 새삼스레 묻는 이도 있다.

그 황당한 질문에 답하기란 유치한 일이거니와

신비(妙)어록은 단지 내 상상의 산물이거나 어떤 이상향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나 자신을 관찰한 <절대 인간보고서>이다.

타인의 생을 보듯 나 자신의 생을 지켜보고

마치 일기처럼 순간순간을 기록한 내 삶의 연구서!

-혹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신에게 띄우는 연서이다.


그것은 일종의 텔레파시와 같다.

나는 해외여행에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에도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나는 영어나 국어가 아닌 텔레파시로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나의 정신은 저 위의 어떤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내려다보며 그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것!

내 마음 나도 몰라, 라는 노랫말도 있지만

나는 내 눈빛과 표정, 자세와 분위기를 기억하며

또한 그런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생각까지도 기억한다.

나와 나를 바라보던 이를 또한 멀리 위에서 지켜보던 내가 또 있었으니까!

그런 장면장면들은 마치 영화처럼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소장된다.

되감기를 하지 않고도 언제라도 재생할 수 있으며

그 분위기와 느낌과 생각까지도 고스란히 다시 지켜볼 수 있다.

전지적 시점인 나의 영화는 그래서 왜곡되는 법이 없다.


'깨달음'이란 단지 어떤 사실을 깨닫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할까?

내가 명상에 관한 글을 쓰게 된 동기라면 동기일 것이다.

타인과는 다른 나,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행동과 생각들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인간들은 학교에 온 학생의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질 때라면 오로지

무언가를 배워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때,
혹은 스승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할 때이다.

아니라면 맞겨루어서 주도권을 쥐어보겠다고 설칠 때이고.

스승과 제자는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사람들은 부득부득 제자의 표정을 하고 제자의 언어로

제자의 자리에 서서 제자의 역할을 한다.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더욱 확고하게 제자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하여간 깨달음의 세계에 ‘나중’은 없는 법!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결판난다. 승부는 ‘순간'인 것이다!

겨루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재가 안되면 미래에라도 이겨보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찰나, 깨달음의 날카로운 칼끝은 급소를 파고든다.

그 순간 이미 죽은 것, 나중에 보자니 그런 말들이 죄다 한가한 잡담인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시간이란 도무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상대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것은 지금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처절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이제야 새삼스레 뭔가 배워서 해보겠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죽은 학문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배워 선생도 교수도 될 수 있겠지만

생명 그 자체인 깨달음의 세계에는 ‘찰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초 전의 과거나 일초 후의 미래조차 허용하지 않는 깨달음의 세계!

그 고독한 세계에 대해 희망을 주는 일 따위 나는 하지 않는다.

“너도 깨달을 수 있어!" 친절한 체하는 말은 그저 사기일 뿐.

그런 까닭으로 그 많은 명상센터며 사이트들이 날로 번성하는 것이다.

대신 너와 나가 없으므로 그 세계를 함께 향유할 수는 있다.

세상에 깨달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 하겠다.

Posted by 신비(妙)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7:08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은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무언가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이 역적모의라면 더욱 좋겠지!

하여간 숙덕숙덕 무언가 재미있는 모의를 하는 것은

그 계획이 성공하고 실패하고 간에

모의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이 바로 무언가를 ‘하는’것이다.

인간을 살아있게 하고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것!

‘하는’동안 우리는 살아있을 수 있다.

 


그렇게 복수를 감행하고

모반을 꾀하고 혁명을 꿈꾸는 동안

우리는 살아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언가를 ‘하는’ 와중에도

때로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에 그 혐의를 두곤 하지만

그것을 의식하는 우리들 자신이야말로 범인임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길게 늘어진 시간을

임의로 단축할 필요가 있다.

기실 뜻이 통한다고 '믿는' 우리끼리

날마다 *달마을에 모여 숙덕숙덕 모의를 하는 것이

저 진나라 죽림칠현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는

한나라의 건국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하나의 멋진 그림!

수호지의 양산박이 현실공간에서의 아지트라면

*달마을은 가상공간의 살롱이라 하겠다.

날마다 세상에서 가장 제미있는 일을 하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혹여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불상사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시간을 콘트롤할 수밖에!

 

도원결의가 한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그 무수한 세월을 기억하기!

세상을 뒤엎고야 말겠다는

큰 뜻을 품었다는 자체로

생은 그 의미를 가지는 것.

 


하여간 내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이것으로 끝이라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삶은 좀 더 강렬해지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럴 때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저 푸르른 하늘과 내가 숨 쉬는 이 공기가 둘 일수 있을까?

그 한 순간은 영원이 되고 세상은 하나가 되며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저 권태롭기만 하던 일상은 그예 성사(聖事)가 된다.

삶은 삶 그 자체가 되고 나의 이야기는 영감이 되어

후세의 누군가를 살아 있게 할 수도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한다.

모르는 이를 만나리라 여겼던 여행길에서

오히려 진정한 제 자신을 만났노라고!

멀리 떠나서야 비로소 자신과 만났노라고!

 


순례 길에서 만난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된다.

걸음이 빠른 사람은 먼저 가고 느린 사람은 늦게 간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먼저 갔거나 뒤쳐졌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도 곧 떠날 사람들!

가는 사람 옷자락을 붙드는 일은 우스울 뿐이다.

서로가 똑같은 순례자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우리는 죽어 축 늘어진 오징어처럼

또한 소파에 너부러진 가부장처럼

삶에 바짝 들러붙어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발짝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 방법으로 삶에 다가가야 한다.

그런 방법으로 삶 그 자체를 ‘살아야’ 한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타인의 생을 보듯 나 자신의 생을 지켜봐야 한다.

삶을 답삭 움켜쥔 채 자신을 합리화하지 말고

진정 '제 자신'이 '삶 자체'를 '살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나라고 믿고 있는 나는 진정한 나인가? - 신비(妙)



*달마을 : 모인터넷 카페의 (옛)이름, 혹은 뜻이 맞는 사람끼리의 가상공간의 모임

Posted by 신비(妙)

경계 지키기 2

경계 지키기 2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7:00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다.

이를 넘어서는 것은 침략행위로 간주된다.

그것은 의존과 간섭을 낳고 인간이 어느 한 인간에게 소속되게 한다.

나라도 속국이 되면 내정간섭을 받아야 하는 것.

선을 넘지 말라!


조그만 틈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려는,

각 영혼간의 거리가 사랑과 비례한다고 믿는 인간은 최악이다.

온 우주를 다 돌아다녀도 좋지만 경계를 어기지는 마라.

왜? 사랑하는 이가 존재 자체로 기쁨이듯이

그런 이는 존재 자체로 모욕이니까!


연인사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스킨십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부부사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을 공유할 수도 없다.

어제의 내 것이 오늘은 내 것이 아닐 수 있고

오늘 남의 것이 내일은 내 것이 될 수도 있다.

소유의 유효기간은 언제나 ‘순간’이다!


중요한 것은 분위기 파악이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것을 정확히 캐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저 저만 당당하면 그게 다 인줄 안다.

타인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섬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분위기 파악에 실패하면 연인에게 괴한 취급을 당할 수도 있고

지인에게서 스토커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남의 집 안방에 들어가 시시껄렁한 소리나 해댄다면 되겠는가?

또 목숨이 걸린 자리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다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 줄 미리 몰랐다는 것은,

분위기 파악에 이미 실패했다는 고백이다.

흥행에 참패하고 쪽박 찬 감독에게 변명은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긴 거짓말 탐지기의 그림자만 봐도 변명부터 하려드는 게 인간이더라.

“거짓말은 누구나 다 하는 거지 뭐.”

“거짓말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군가가 옆에서, 당신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눈이라도 부라린단 말인가?

이런 식이라면 그는 평생을 변명으로 일관해 온 사람일 터.


자고로 예상외의 반응에 놀라거나 실망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지점을 보고 있었다는 말.

각자 서 있는 곳이 다르므로 소통할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상대가 어디에 서 있는지 보지 못했으므로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다.


자신을 내려다 볼 줄 모르는 자는 타인도 볼 수 없는 법.

그저 제 장단에 춤이나 춰주는 친구를 원한다면,

세상에 장난감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원래 정상에서는 모든 것이 보이는 법인데

존경할 수 없는 사람과 어떻게 친구가 되겠는가?


하여간 인간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다.

제아무리 사랑하고 물고 빨아도 죽을 때는 홀로 가야 하는 법이다.

그 엄연한 진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사람들은 그저 제가 잘나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줄 안다.

그리하여 오늘도 저는 영원히 안 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댄다.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투명한 그 눈을 바라 보노라면

투명한 그 눈을 바라 보노라면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6:52

어쩌면 세계를 초월해버린 눈빛!

투명한 수정체, 자유자재의 동공,

고양이의 눈은 나를 고무시킨다.

신(神)이 빚어놓은 그 절묘한 것은

이루지 못할 나의 열망까지를 담고 있다.

몸조차도 투명하게, 흔적 없이 존재하고픈 열망.

 

 

나는 이 세계에 육체를 빚지고 있다.
그 접점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날 나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버전에의 접점을 다시 가지는 것!

나는 그것을 부활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하여간 인간들이 그 무엇인가에 집착을 하는 것은

일단 그것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이다.

삶에, 사랑에, 가족에, 또한 결혼이나 자식에

자랑스럽다는 듯 집착하는 이들을 보라!

십년 뒤 혹은 이십년, 오십년 뒤에는

제가 집착하던 것들에 대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자들.

깨달음에 집착하는 이들 역시 아니나 다를까

매사에 끈적끈적 들러붙는 스타일이다.

 


도대체 죽음이 삶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가 기억하는 한 죽지 않는다.

날마다 얼굴을 봐야 그 존재를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죽음은 슬플 것도, 비극일 것도 없는 그저 삶!

매 순간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일 뿐이다.

구름모양이 조금 전과 달라졌다고 눈물 흘리는 이가 있을까?

 


자신의 룰이 없는, 영혼이 빈곤한 자의 연극이 슬프다면 모를까.

날마다 도처에서 참혹한 살인극이 벌어지는 이 세계에서

새삼스레 제 가까운 이의 부재에만 눈물 흘리는 비정함이란.

내가 인간이라면 그런 잔인한 족속들과는 눈 마주치지 않을 터.

 


시간에, 거리에 비례하는 게 정이고 사랑이라면

차라리 인간도, 신도 없는 곳에서 홀로 살아가리라.

마치 연기처럼, 환영처럼, 도둑처럼!

그리하여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또한 그럼으로써 더욱 강렬하게 존재하리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둑고양이라는 말에 꽤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

그 이름은 낭만적이며, 심지어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마치 전사 같다.

음습한 들판에서 태어나 어두운 뒷골목에서 살아간다.

인간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 독립적인 세계의 주인, 

졸고 어슬렁거리며 언제든 떠나버리는 자유!

인간에게 그러하듯 아마 신에게도 그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그들의 복수는 퍽이나 매혹적인 방법으로 자행될 것이 분명하다.

고양이를 조심하라!

언제 당신의 마음을 훔칠지 모르니.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캐릭터 완성하기

캐릭터 완성하기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6:42

캐릭터 완성하기

- 나의 변화로 너의 변화를 이끌기


 

 

요즘 인기 있는 리얼리티 개그프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자신에 대한 상대의 서운한 대접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것'이 그것.

물론 그것이 프로그램 내에서의 캐릭터일 수도 있고

단순히 웃기기 위한 제스처나 포석일 수 있지만

또한 다분히 연기자 개인의 실제 캐릭터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들은 현실과 가상을 쉴 새 없이 넘나들며

스스로도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래서 상대가 노골적으로 나올 때는 실제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있어 가상은 곧 현실인 것이다.

이는 현실의 우리들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다.


대다수의 우리들 또한 그러한 불만이 있을 때 별 생각 없이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관계가 변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놓고 말로 한다면 그러한 관계는 더욱 고착화될 뿐.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혹은 그저 순진하게 던진 자신의 한 마디로

오히려 ‘대접 못 받는 찌질이’ 캐릭터로 다시 태어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관계를 다시 세팅할 수는 없다.

대신 아주 어렵지만 나 자신을 다시 세팅할 수는 있다.

다만 그리하면 관계를 재부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아주 멋진 곳에 데려다 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말로 풀어보자는 등의 우스운 모의는 그저 말장난에 그칠 뿐이다.


시나리오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축이다.

리얼리티 연예프로에서도 역시 그것이 성공의 관건이 된다.

혹자는 그것이 가상이기에 연기일 뿐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백퍼센트 가상현실인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그 배우만의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가상과 현실, 실제와 환상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장자가 나비 꿈을 꿀 수도 있고 나비가 장자 꿈을 꿀 수도 있다.

명상가들은 잡생각이 없어 꿈을 안 꾼다는 헛소리도 있지만

나는 별나게도 특이하고 환상적인 꿈을 많이 꾸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내 뜻대로 내 의식이 깨어 꿈을 골라 꾸는 것!


그렇다면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것이 꿈인가,

인간들이 눈을 감고 헤매는 ‘삶’이란 것이 바로 꿈인가?

우리들 인생도 역시 들여다보면 그저 한 편의 영화일 뿐.

순간순간 자신이 정한 룰에 따른 제스처를 취할 뿐이다.

그러므로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축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너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 땅에 왔느냐?

도대체 어디서? 왜? 또 죽을 땐 어디로 갈 것이냐?

이 현실적이고도 절절한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이 비현실적이라며 애써 고개 돌렸던 이는

그동안 자신의 삶을 변명과 타협으로 일관해 왔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간 그러한 이유로 매혹적인 악역, 스타일리쉬한 악당이 가능하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찌질한 주인공도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몫이지만

푸른빛은 쪽빛에서 나오는 것!

배우 개인의 매력 또한 크게 작용한다.


혹자는 깨달음이나 삶에 대해서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한다.

자신 고유의 룰은 없고 타인의 텍스트에서 그것을 빌려온다.

그러니 기준은 일관되지 않고 행동은 돌발적이며 어설프다.

그러나 깨달음은 텍스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보석처럼 발견되는 것이다.


타인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어쩌면 환상의 세계에서 허깨비를 쫒는 것.

있지도 않은 보물을 찾느라 신기루를 쫒는 것이고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남의 꿈에서 참고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오로지

그 사람의 세상을 보는 관점, 혹은 세상을 사는 방식일 것이다.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는 자신의 룰을 창조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 장면에서 환상은 곧 실제와 다르지 않다고 말해선 곤란하다.

그것을 삶 속에서 발견하기란 수 억 번쯤 죽었다 깨어나는 일보다 어려우니까!

그 보석은 가장 혹독하고 춥지만 가장 높고 멋진 곳에

자기 스스로를 데려갈 줄 아는 이에게서만 발견되니까!


하여간 나는 어디선가 이런 사람을 봤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힘든 순간이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이런 식으로..

순진한 발상이긴 하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아마 하늘, 혹은 신일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얼마든지 다른 존재로 대체될 수 있다.


내가 한창 삶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에, 인간들에게 어떤 포즈를 보여 줄 것인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신이라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만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만약 신이라면

인간들 하나하나의 크고 작은 기쁨과 고통들에

일일이 참견하여 아는 체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설사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경망스레 호들갑 떨 일이 없다.


“신이 있다면, 왜 인간-나의 고통에 그토록 무관심한가?”

따위의 투정을 스스로 낯부끄럽게 여기게 될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추앙할 이를 찾아내기 위해 오늘 하루도 분주하다.

하지만 그들이 타인의 삶을 빌리는 사이, 자신의 삶은 속절없이도 흘러간다.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누구, 인간을 만나 보았느냐?

누구, 인간을 만나 보았느냐?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6:34

대부분의 남자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을 투우장의 투우사쯤으로 착각한다.

기선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 모습은

차라리 미로 속에 갇힌 햄스터 같다.

전쟁이 남자들의 놀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나는 솔직히 깨달았다는 사람들에 관심이 없다.

그 많은 명상센터며 사이트들은 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을 알아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진다.

부담스럽다. 가만히 앉아서 말씨름이나 하면

세상이 자신을 알아줄 줄 아는 자들.


일찍이 구지선사는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다.

습관처럼 스승을 흉내 냈던 동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을 테고

어쨌든 그는 손가락 대신 깨달음을 얻었다던가!

하여간 깨달았다면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이다.


영화에서는 곧잘 스승을 죽이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스승이 없다함은 곧 스승에게서 독립하는 것.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아기 새처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함석헌은 누가 뭐래도 다석의 제자가 아닌가!

하긴 리얼리티 개그프로를 보면 그런 장면 꼭 있다.

자기 말-개그는 하지 않은 채 남의 말에 토 달거나 관전평 하는,

그러느라 귀한 시간 다 보내고 결국 자기 말은 못 하는 사람.

자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구구절절 제 히스토리 말고 진정한 자신의 말.

선인의 명언이 아닌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 나온 말.

제 안에서 곰삭아 비로소 제 고유의 향기를 내는 말.

주도권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것.

게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조에 의한 것이다.


자신의 말을 하는 이는 언제 어디서든 저절로 주도권을 가진다.

상대의 말에 토 달거나 말씨름 하지 않고도

그 어떤 타이밍에도 제가 주도한 판을 펼친다.

또한 그에 의한 희생자(!)를 원치도 않는다.

아니, 애초에 게임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도 불러보지 못한 노래를 부르고

아무도 그려보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아무도 살지 않은 삶을 사는 것!

자신을 마음껏 펼치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주도권은 탄생한다.


물론 자신에게 골몰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

단번에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야 가능한 일이다.

생각만으로 전 우주를 섭렵하고

비로소 사랑,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완전한 만남을 준비할 수 있다.


혹여 만남에 앞서 상대에 어울릴 그럴듯한 대화꺼리를 준비한다면?

그는 이미 부담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당연히 이야기 소재는 한정되고 분위기는 경직된다.

준비한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할 셈인가?

자신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저기 수 억겁을 돌고 돌아 비로소 만날 그리운 이가 있다.

생각만으로도 어지럼증이 도지고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한다.

전율에 휩싸여 달려가기에 앞서, 잠시 일시정지를 누른 다음

시사프로와 뉴스를 챙기고 유머집이나 암기하고 있다면?

뭐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가 되는 거다.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골몰하는 방법으로,

사랑, 그 자체가 되는 방법으로!

다만 제 삶으로써 제 앞에 일어날 모든 것에 대비하는 자만이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


타인에게 부담주지 않으면서 자신 또한 부담 느끼지 않기.

진정 그리운 이라면 만남 그 자체로도 이미 부담이 되는 것.

부담스런 포즈로 제 존재 자체를 모욕이 되게 해선 안 된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저 애써 만만한 사람들이나 만나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그저 연속극 주인공이나 부러워하며 사는 이들.


달리 스승과 제자가 아니다.

자신보다 앞선(?) 이에게 부담을 느끼면 그 순간 스승과 제자가 되는 거다.

그래서 남자들은 곧잘 요상한 방법을 쓰곤 한다.

추종하지 않는 방법으로 추종하기,

맞겨루는 방법으로 노예 되기. 무시하는 방법으로 집착하기.


그러나 그것은 전쟁을 하면서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고, 주지 않으면서

백퍼센트 자신을 펼쳐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삶 안으로 깨달음을 안고 들어와야 한다.

어설픈 초짜의 촌티를 벗고 비로소 완성된 캐릭터를 가지는 것.


진짜 게임은 삶의 매 순간 일어난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산을 만났을 때,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를 만났을 때,

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자기 자신, 혹은 신과 게임을 벌이는 것.


왜 하늘에 대고 도발하지 못하는가?

왜 신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는가?

“이 정도로 나를 꺾어 보시겠다? 내가 여기서 멈출 것 같은가, 교활한 양반 같으니!”

왜 외치지 못하는가?

똑같은 인간들끼리 게임해 봤자다.


신과 게임을 벌이기.

삶을 걸고 올인하기.

텅 빈 길 위에 서서 외치기.

거침없이 달리기.

인생은 로드무비, 결국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다!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경계 지키기

경계 지키기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짧은 글1 2008. 12. 11. 16:30

개인의 영역이 있다.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일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거리.

그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아슬아슬함.

가야금의 열두 명주 줄, 당겨진 활시위.

그 팽팽한 긴장감을 보라.

밀착된 관계는 서로를 파괴한다.

 

 

아슬아슬한 선이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다.

뜨거우면 늘어지고 차가우면 끊어지는,

각자의 영역을 보호하는 보호선이자

타인과 나를 공히 같은 인격체로 인정하는 독립선,

각자의 법을 수호하는 수호선이 있다.

 

 

아슬아슬한 선이 있다.

포즈와 포즈 사이에 있다.

스승과 제자는 없지만 위, 아래는 있으며

예의 따윈 필요 없지만 그것이 무례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만하되 교만해서는 안 된다.

 

 

소리쳐 말하기는 쉬워도

누군가 내게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은 어렵다.

사랑한다 말하기는 쉬워도

그 단 한 사람과 완전하게 소통하기란 어렵다.

 

 

사소한 말 걸기에도 미학이 필요한 법.

사랑한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다가가면

상대는 꼭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법이다.

다가간 그 만큼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다가간 그 만큼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다시 한 번 다가가기를 포기해선 안 되겠지만

그것이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경계가 있다.

온전히 자신을 펼치면서도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경계가 있다.

상대를 피곤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나를 보여줄 수 있고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으면서

완전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다.

 

 

아름답게 다가가고 멋지게 떠나야 한다.

뜨겁게 만나고 쿨하게 돌아서야 한다.

담백하게 웃고 투명하게 울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예민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 섬세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과 완전하게 소통하는 일이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인지,

무수한 세월, 우리 그 시간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에게 골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방법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빛의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깨어 고독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침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눈빛만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그날까지

자신에게 온전히 골몰할 수 있어야 한다.

끝내 시간에 잠식당하지 않고

시간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다.

아슬아슬한 선이 있다

. -신비(妙)

Posted by 신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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