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단계 진화한 인간,
더 나은 종種이 되고 싶다는 과학자가 있다.
열등한 인간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그의 소망은
몸에 칩을 이식하여 로봇 인간이 되는 방법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상대의 신경계가 뇌를 자극하면 그의 생각을 읽는 것이 가능하고
그런 방법으로 말을 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TV 다큐 프로그램으로 본 그는 하루가 다르게 로봇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고무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그는 왜 애초에 한 단계만을 원했던 것일까?
단번에 날아오르지 못한다면 실패다.
아기새도 첫 비행에서부터 힘차게 창공을 가른다.
단번에 날아오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편에, 신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신의 편에 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진리의 편에 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역사의 편에 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진보의 편에 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스스로에 물을 일이다.
신이라는 집에서 진리라는 옷을 입고
역사라는 친구와 진보라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애초 인간은 신의 재현!
기실 신의 편에 서는 것이 가장 편안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야 아슬아슬하고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신의 옆자리야말로 가장 따뜻하고 안락한 곳!
우리는 보통 결혼을 하고 내 편이 생긴 것에 흡족해한다.
혹은 권력에 줄을 서고 든든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그 참을 수 없는 얄팍함이란!
위태로움이란!
반면 신이라는 후원자가 그 언제라도 든든히 내 뒤를 받쳐 주고 있다는 것.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다.
신을 영원히 내 편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신의 편에 선 사람에겐 매 순간이 소통이며 사랑이다.
몸에 칩을 이식하지 않고도 언제든 시공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다.
차라리 깨달으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깨달음의 세계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엄마 품을 벗어나면 곧 진정한 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
금 밖으로 나가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보는 것,
온실 속 화초가 태양과 바람을 구하는 것,
그리고 조롱 속 새가 세상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는 것이다.
우물 밖에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있다.
온실밖엔 춥지만 멋진 세계가 있다.
조롱밖엔 아슬아슬하지만 자유로운 세계가 있다.
인간에게 비참한 일이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혼미와 그 가운데서도 내달리는 몽유병 같은 삶, 그리고 뻔한 끝!
허공을 향해 과감히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보이지 않던 다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디아나 존스가 성배를 찾은 것도 다 절벽 끝에서 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길 없는 길이 있다!
그것은 빛으로 된 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길이다.
눈을 감고 영혼의 발걸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절벽과 절벽 사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눈 부신 빛이 비치고 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온 몸을 던진다면 단번에 날아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허공을 유유히 비행하다가
솔개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매 순간 삶의 정수를 끌어 올릴 수도 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는 명제를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을 나는 믿지 않는다.
생존과 짝짓기 외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아둔함,
무엇보다 그 자위와 변명, 안주가 밉다.
또한, 그러므로 완전한 신에게 의존하여야 한다는 발상이 위험스럽다.
인간이 단지 신과 동물의 중간 지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삶뿐이다.
오로지 삶으로서 살아 있을 때
신은 내 곁으로 온다.
나에게로 와서 내가 된다.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