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서술이 아니라
묘사일 때 그렇고,
정보나열이 아니라
깨달음의 정수일 때 그렇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때로 자기 글을 읽고
식도가 쩌릿쩌릿,
인후가 뻐근해오는지 모르겠다.
빈 속에 독주를 쏟아부은 것처럼
싸하고도 예리한 것이
내장을 차례로 다 훑고 내려가는지 모르겠다.
가슴 한 쪽이 서늘해졌다가
돌연 저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확 덮쳐 올라오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기어이 눈가가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지,
아스라한 낭떠러지로 제 영혼 떨어져 버리는지,
마침내 온 몸 통째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는지 모르겠다.
아니라면 불쌍하기도 하지.
그는 한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남의 건물에 들어가
여기저기 갈라지고 벌어진 틈을
단지 보수하는 것일 터,
그런 자들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업자,
학자가 아니라
중개상이라고 하는 거다.
막장드라마 쓰는 자들이 작가라면
우리 옆집 똥개는 성모마리아고
저 길고양이는 하느님이다.
이 땅의 많은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였으니
서울역 노숙자는 예수님,
길거리 건달들은
부처님 되시겠다.
글을 읽으면 어떤 그림이
영화처럼 펼쳐져야 한다.
네가 사는 곳은
이차원 평면이 아니라
삼차원의 입체.
시시한 그림이 아니라
숨이 턱 막히는 멋진 그림,
밥 먹고 설거지하는 일상이 아니라
차원을 가로지르는 스펙타클,
시공을 넘나드는 스케일이어야한다.
돈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를 섭렵할 수 있다.
무중력을 경험할 수 있다.
단지 네가 깨달음에 푹 빠진 채로
몸에 힘을 뺄 수만 있다면!
마치 어느 적막한 강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배영을 할 때처럼 말이다.
온 몸에 힘을 빼고
그렇게 유영하다 보면
떨어지는 유성을 발견할 수도 있고,
네 고향별에 대한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다.
진정으로 멋진 경험은
돈이 들지 않는다.
몸이 받아들이는 경험보다
정신적 영적체험이
너를 상승시킨다.
세계일주도 결국
정신적 충격이다.
영적 데미지이다.
인생은 고행이 아니라
상승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끄러운 꼬리 칸은
너의 몸 고생이 아니라
정신적 상승에 이바지한다.
2014/01/20 10:15
-신비(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