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통째로 오해.
이해를 구하기 보단
오해를 감당해보자.
어차피 너는 삶조차
이해하지 못할 테니.
2014/01/04 19:00
-신비(妙)
인생은 통째로 오해.
이해를 구하기 보단
오해를 감당해보자.
어차피 너는 삶조차
이해하지 못할 테니.
2014/01/04 19:00
-신비(妙)
나와 신의 경계를
가볍게 넘기.
나와 삶의 경계,
내 한 몸과 우주의 경계는
훌쩍 뛰어넘고,
대신 너와 나 사이의 경계,
공과 사의 경계는
철저히 지키기.
세상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에는 있다.
세상에 금은 없다.
계율은 없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에는 있다.
결코 넘어야 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고
또 훌쩍 뛰어넘고 초월해야 할 선이 있다.
세상에는 그런 것이 있다.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2013/12/30 15:43
-신비(妙)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나 예뻐?” 하고 묻는 것은
진짜 미스코리아 심사 위원처럼
자신을 낱낱이 평가해달라는 말이 아니다.
되지도 않는 요리를 해주고
“맛있어?” 라고 묻는 것은
남자친구를 쉐프로 생각해서가 아니다.
남자들이 여자 친구의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순간
조사의 죽비가 날아든다는 사실.
남자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뿐이다.
정답을 찾으라는 게 아니라
찔러주는 데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삶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
여자는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다.
조사의 모든 물음은
물음이 아니고 답이다.
여자 친구의 모든 물음은
질문이 아니고 정답 그 자체이다.
여자는 조사가 아니고
남자는 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남자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독백) “으악, 정답을 찾아야 해! 뭐지? 뭐지?”
아니다.
여자의 모든 말은
의문문이 아니고 명령문이다.
“나 예뻐?” 가 아니고
“나만 봐!” 이다.
평가하지 말고
자로 재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사랑에 방점을 찍었다면
그저 쿨하게 말랑말랑해지면 된다.
눈빛을 쏘면 그저 녹아내리면 된다.
그게 어려운가?
사실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왜 하고 싶은 데로 못하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온몸에 힘이 들어갈 때가 있다.
경직되어 늘 답을 찾으려는 자.
물론 어려울 때 그렇다.
상대가 어려울 때,
답이 잘 안 떠오를 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앞이 캄캄할 때,
멋있는 말을 주워 섬겨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될 때 인간은 경직된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사설이 많아진다.
주저리주저리,
그만 조사 앞의 동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안 된 것은
그럴 때 상대는 그것을 알아본다는 것.
센 척은 금물이다.
센 척 할수록 꼴만 우스워진다.
릴렉스 할 것.
몸에 힘을 빼고 배영 하듯 나아가면 된다.
네가 수영하는 곳은 풀장이 아니라 바다.
뒤에 뭔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삶은 원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본래 위태로운 것이다.
벼랑 끝에서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인생이란 상어 등에 올라타기,
사자와 함께 춤추기,
야생마 길들이기이다.
세계를 초월하여 더 큰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안락하겠는가?
죽음을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질문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퍼뜩 눈치 채지 못하면
그대는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한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우주 저 끝으로 나가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저 말랑말랑 쿨해지기.
2013/12/30 09:25
-신비(妙)/말랑말랑
응답하라 2013!
은유로 말해야한다.
선비라면 기본.
정치인들도 다 은유법을 쓴다.
속담도, 시도 마찬가지.
세상에 은유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대,
은유를 받아 들여야 한다.
생은 은유다.
생을 통째로 바라볼 때
그것은 얻어진다.
생은 한 덩어리.
전체를 한 번에 보아야지
부분을 보아선 안 된다.
핵과 단면을 보아야지
측면을 보아선 안 된다.
인생은 통으로 보면
그저 꿈이다.
단 한 순간의 전율이다.
찬란한 비상이다.
거대한 파도다.
반전이며 역설이고
반전의 반전이고
역설의 역설이다.
비로소 바로 옆 신의 호흡이 느껴진다.
온 우주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때 생을 은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달걀을 보지 말고 닭을 볼 것.
파도를 보지 말고 바다를 볼 것.
인생을 보지 말고 우주를 볼 것.
인간을 보지 말고 신을 볼 것.
태초와 불멸을 동시에 볼 줄 알 때
비로소 너의 생도 볼 수 있게 된다.
신과 나란히 걸어갈 때
마침내 너도 살아 숨 쉬게 된다.
역사 속의 자신을 볼 때
그예 진정한 생과 맞부딪히게 된다.
생은 은유다.
생은 통 문장.
생은 짜릿한 탐미.
생은 매순간의 신세계.
더 이상 생의 그 어떤 언덕에도 기대지 말고
아슬아슬 첨단을 걷기.
생의 아스팔트를 탐하지 말고
오솔길을 찾기.
생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주눅 들지 말고
파도 그 자체가 되기.
물에 뜨기를 바라지 말고
그저 헤엄쳐 나아가기.
두려움에 떨지 말고
단 번에 상어 등에 올라타기.
생은 은유다.
2013/12/27 10:35
-신비(妙)/생은 은유
말하자면 보석을 캐내는 일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을 길어내는 일이다.
옆에 멀뚱히 서 있으면 다칠 수도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길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옆에 무엇이 있던 신경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보석 캐면 저 보석이 튀어나오고
여기서 긷다보면 저기서도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대신 가꾸고 꾸미는 것은 하지 않는다.
캐내는 동안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것은 가공자의 몫.
나는 가공기능사가 아니라
원석을 캐는 광부이고,
보물섬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해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내야만 한다.
눈앞에 거대한 보석광산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다 보물섬이기 때문이다.
보물섬에서는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사랑타령, 가족타령, 선악타령 따위 할 수 없다.
누구나 다 해적이 되어야 한다.
귀부인처럼 새치름하게 앉아서
누군가 손가락에 다이아몬드를 끼워주길 바랄 수 없다.
싱그러운 땀 냄새 풍기며 원석을 캐내야 한다.
원석은 매끄럽지 않다.
때로 긁혀서 피가 날 수도 있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보고
상처받는 사람은 없겠지만
영감을 받는 사람도 없다.
신비(妙)어록은 때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영감을 받는 이가 더 많다.
또한 상처도 어느 순간 영감으로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건 영감이다.
따뜻하고 나른한 글은 멜로드라마와 같다.
원시부족 주술사의 독과 같다.
부적을 써주는 무당,
사탕을 건네는 유괴범 혹은,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사기꾼과 같다.
판타지를 주지만 또한 그 판타지에서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판타지를 주며 꿈은 빼앗아간다.
그예 생이라는 꿈,
산산조각 나게 만든다.
그대 사소한 욕망과 거래한다.
독자와 거래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문학.
나른하고 감상적인 문학에 속지 말 것.
아직도 20세기적 마인드로 충효 선악타령하지 말 것.
대신 거친 야생의 원석을 덥석 주을 것.
대자연이라는, 신이라는 보석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
그 생생한 삶의 현장에 증인으로 서 있을 것.
문학은 죽었지만 야생은 살아 있다.
잘 커팅된 다이아몬드는 비싸게 팔리겠지만
영감을 주지는 못한다.
호화로운 보석은 부자들의 것이지만
거친 야생의 원석은 예술가의 것, 모든 인간의 것이다.
야생은 아름답다
펄펄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문학은 죽었으나 인간은 아직
살아 있다.
2013/12/26 11:50
-신비(妙)
21세기 최고의 문제작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2013.8.15)
세상에는 포지션이 있을 뿐
선악은 없다.
그러나 절대선, 절대악은 있다.
인류에 대한 모독,
신에 대한 억압,
진리 부재,
인간 상실,
독재와 사이비종교가
바로 절대악이다.
그렇다면 절대선은 뻔하다.
신과 인류와 나란히 걷는 것.
바로 깨달음이다.
진리이다.
그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2013/12/25 19:49
-신비(妙)/절대선과 절대악
은유로 말해야한다.
선비라면 그건 기본.
정치인들도 다 은유법을 쓴다.
속담도 마찬가지.
세상에 은유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대는
은유를 받아 들여야 한다.
생은 은유다.
더 이상 생의 언덕에 기대지 말고
아슬아슬 생의 첨단을 걷기.
2013/12/25 15:35
-신비(妙)/생은 은유
동쪽으로 계속 가면
서쪽이 나온다.
우주 이쪽 끝에서 계속 가면
우주 저쪽 끝이 나온다.
그렇다.
동쪽과 서쪽은 같다.
우주의 이쪽 끝과 저쪽 끝도 같다.
그러나 이는 우주를 한 바퀴를 돌고 난 다음에 할 얘기.
제 자리에서 하는 건 반칙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아보지 않은 이가
에베레스트 별 거 없다고 하면 안 되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자가
여자 다 똑같다고 하면 안 된다.
더구나 진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게 아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진리는 차원이동.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평지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바로 치고 올라가는 것
정상에 서서 산 아래를 굽어보는 것이다.
시야가 다르고 눈높이가 다르다.
포지션이 다르다.
진리는 하나지만 두루뭉수리가 아니라
최고로 뾰족하고 날카롭다.
냉엄하고 준엄하다.
진리를 만나려면,
진리와 하나 되려면,
스스로도 예리하고 날카롭지 않으면 안 된다.
첨단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에베레스트에서만이 너의 에베레스트를
완전하게 바라볼 수 있다.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스리슬쩍 묻어가선 안 된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결코 아니다.
공자 맹자 외우는 이들 중에 진리를 아는 이는 없다.
그예 진리와 만난 이는 없다.
진리는 곧장 치고 들어가는 것이지
방편을 끌어들이거나,
경전을 외워 접근하는 게 아니다.
방편은 헛짓이고,
동서양을 불문 경전에는 별 내용이 없다.
그저 진리의 성질이나 계명을 읊어놨을 뿐.
그를 외워봤자 공염불,
소문난 잔치, 속 빈 깡통, 빈 수레 될 뿐이다.
진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차원 이동, 포지션 이동이다.
지하철 끝에서 되돌아오는 게 아니라
우주선 타고 우주 끝까지 가는 것.
포지션 상승이다.
뭉툭한 포지션에서 가장 첨예한 포지션으로 나아가기.
안락하려는 인간의 꼼수도 계속되고
그를 깨우려는 신의 포효도 계속된다.
2013/12/24 10:10
-신비(妙)
노예로 살 것이냐
주인으로 살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노예로 살 것인가
나쁜 노예로 살 것인가
그것만을 고민한다.
선악이 아니라
미추가 아니라
빈부가 아니라
포지션을 고민할 것.
레벨 업 할 것.
뇌를 아예 업그레이드할 것.
2013/12/23 14:24
-신비(妙)
노예는 노예다.
좋은 노예, 나쁜 노예는 없다.
주인이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좋은 노예란 종종 걸음으로 열심히 일해
주인에게 충성하는 노예고
나쁜 노예란 제 잇속 챙기느라 꼼수로
주인을 속이는 노예다.
아니라면 설국열차 꼬리 칸 사람처럼
반란을 꿈꾸는,
주류를 치거나 왕을 끌어내리거나
보물을 향해 떠나는
해적이다.
물론 해적은 이미 노예가 아니다.
가장 나쁜 노예는
주인과 같다.
주인은 유유자적 완전을 이룬다.
단 번에 비상하려면,
100%의 준비를 해야 한다.
완전한 준비가 곧 완전이다.
일생에 한 번을 비상하더라도
완전하게 비상하기.
그러므로 서둘러 대열에
합류하지 않는다.
우주가 그득한 것을 알기에.
신이 이미 완전한 것을 알기에
완전한 준비만이
완전한 비상임을 알기에.
출정이 곧 승리
출사가 곧 의미이다.
첫 걸음이 마지막 걸음
첫 획이 바로 화룡점정이다.
그것은 두려움이자 설렘.
삶은 두려움이자 설렘이다.
삶은 단 한 순간의 전율이다.
단 한 번의 찬란한 비상이다.
준비란 스펙 쌓기가 아니라
숨 고르기이다.
도움닫기이다.
기나긴 활주로를 달리는 일이다.
준비 없이 서둘러 경쟁의 대열에 합류하는 자야말로
가장 노예다운 노예, 최악의 인간군상이다.
여자라면 기존의 여성성에 반기를 드는
나쁜 여자가 될 것.
인간이라면 신에 도발하는 나쁜 인간이 될 것.
궁극의 인간, 삶의 주인공이 될 것.
대개 인간들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룰이다.
2013/12/23 13:30
-신비(妙)